765kV 초고압변압기·데이터센터 전력 솔루션으로 AI 인프라 시장 공략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효성그룹을 대표하는 글로벌 제품을 꼽으라면 스판덱스와 타이어코드가 먼저 거론됐다. 하지만 인공지능(AI)이 산업 지형을 바꾸면서 효성의 또 다른 사업이 그룹의 위상을 다시 쓰고 있다.
효성중공업의 초고압변압기와 전력기기다.
AI 데이터센터 건설이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노후 전력망 교체와 신재생에너지 연결 투자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변압기는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기 어려운 전략 설비로 부상했다. 효성중공업은 이 시장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확보한 생산 기반과 초고압 기술력을 바탕으로 수주 규모를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20일 효성중공업의 실적 및 업계 자료를 종합하면 올해 상반기 중공업 부문 신규수주는 약 7조4987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4조2060억원보다 78.3% 증가했다.
2분기 말 중공업 부문의 수주잔고는 약 17조507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63% 늘어나 역대 최대 수준을 기록했다.
숫자보다 눈에 띄는 것은 수주의 지역과 제품이다.
상반기 신규수주 가운데 미국 비중은 71%에 달했다. 2분기 말 수주잔고에서도 미국이 57%를 차지했다. AI 데이터센터 확대와 노후 전력망 교체라는 미국의 구조적인 전력 인프라 수요가 효성중공업의 성장으로 연결되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성과의 출발점에는 조현준 효성 회장이 추진해온 미국 현지화 전략이 있다.
효성중공업은 2020년 일본 미쓰비시가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운영하던 초고압변압기 공장을 인수했다. 당시에는 글로벌 전력기기 시장이 지금과 같은 호황에 진입하기 전이었다.
하지만 AI 데이터센터와 전기화, 노후 송전망 교체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특히 멤피스 공장은 현재 미국에서 765kV급 초고압변압기를 설계·생산할 수 있는 핵심 생산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765kV급 변압기는 대규모 전력을 장거리로 송전하는 초고압 전력망에 사용되는 설비로 높은 기술력과 생산 경험이 요구된다.
효성중공업은 올해 미국 유력 송전망 운영사와 약 7870억원 규모의 765kV 초고압변압기 및 리액터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여기에 1분기에는 단일 프로젝트 기준 약 9200억원 규모의 765kV 변압기 수주가 실적에 반영되면서 초고압 분야의 경쟁력을 다시 확인했다.
결과적으로 2020년 멤피스 공장을 확보했던 결정은 단순한 해외 생산기지 인수를 넘어 미국 전력망 투자 확대에 대응할 수 있는 전략적 거점을 선점한 셈이 됐다.
효성중공업은 이후 멤피스 공장에 대한 추가 투자도 이어가고 있다. 생산 및 시험설비를 확대해 현지 생산능력을 높이는 동시에 미국에서 요구되는 대형 초고압변압기의 공급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시장도 미국에서 유럽으로 넓어지고 있다.
효성중공업은 올해 상반기 북유럽에서 약 2000억원 규모의 전력설비를 수주했다. 핀란드와 노르웨이에 이어 덴마크와 스웨덴까지 공급 지역을 확대하면서 미국에 집중됐던 전력기기 성장축을 유럽으로 넓히고 있다.
유럽 역시 재생에너지 확대와 전력망 현대화로 대규모 송배전 투자가 필요한 시장이다. 풍력과 태양광 등 발전원이 늘어날수록 생산된 전력을 기존 전력망에 안정적으로 연결하기 위한 변압기와 전력기기의 중요성도 커진다.
효성중공업 입장에서는 미국의 AI 데이터센터와 노후 전력망 교체, 유럽의 에너지 전환이라는 서로 다른 수요가 동시에 시장을 확대시키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효성은 한 단계 더 나아가고 있다.
과거에는 변압기와 차단기 등 개별 전력기기를 공급하는 것이 중심이었다면 최근에는 AI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전력 인프라 전체를 하나의 사업 기회로 보고 있다.
AI 데이터센터는 일반 데이터센터보다 훨씬 많은 전력을 소비한다. 대규모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는 초고압변압기뿐 아니라 배전, 전력품질 관리, 에너지저장장치(ESS) 등 다양한 전력 솔루션이 필요하다.
효성중공업이 데이터센터 전력 인프라 시장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이유다.
이러한 사업 구조의 변화는 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효성중공업은 미국을 중심으로 고수익 전력기기 매출이 확대되면서 올해 2분기 기준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신규수주 증가에 따라 회사는 올해 연간 수주 목표도 12조원으로 상향했다.
효성그룹 전체에서도 중공업의 존재감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효성은 올해 2분기 매출과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1.9%, 133.7% 증가했다. 효성중공업의 실적 개선이 그룹의 성장 흐름을 이끄는 핵심 요인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흥미로운 점은 효성의 변화가 전통 제조기업이 AI 시대에 성장하는 또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AI 산업의 주인공은 엔비디아와 같은 반도체 기업이나 글로벌 빅테크로 보이지만 AI 인프라가 실제로 가동되기 위해서는 막대한 전력이 필요하다.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력을 데이터센터까지 보내는 송전망과 변압기 역시 AI 생태계의 필수 인프라다.
반도체가 AI의 '두뇌'라면 전력망은 이를 움직이는 '혈관'인 셈이다.
조현준 회장은 오래전부터 기술 경쟁력과 글로벌 현지 생산을 효성의 핵심 성장 전략으로 강조해왔다. 멤피스 공장 인수 역시 당장의 시장 규모보다 장기적인 미국 전력 인프라 시장을 보고 내려진 투자였다.
그 판단은 AI가 예상보다 빠르게 확산하면서 더욱 큰 사업 기회로 돌아왔다.
다만 지금부터가 더 중요하다.
글로벌 전력기기 시장의 호황이 장기화되면서 경쟁사들도 북미 생산능력 확대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공급 부족이 완화되는 시점에도 효성중공업이 기술과 수익성 측면에서 경쟁우위를 유지할 수 있는지가 다음 과제다.
효성중공업은 이에 대응해 미국 현지 생산능력을 확대하는 동시에 유럽과 중동 등으로 시장을 다변화하고 데이터센터 전력 솔루션 등 고부가가치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효성의 지난 수년간 행보를 보면 하나의 흐름이 선명해진다.
2020년 미국 멤피스 생산거점을 확보했고, 이후 초고압변압기 생산능력을 확대했다. 그리고 AI 데이터센터가 세계 전력 수요를 끌어올리기 시작한 지금, 당시 확보한 생산기지와 기술이 17조원이 넘는 수주잔고로 연결되고 있다.
AI 시대의 승자가 반드시 AI를 만드는 기업일 필요는 없다.
AI가 작동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기업도 승자가 될 수 있다. 효성중공업이 글로벌 AI 인프라 시장에서 주목받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