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 테라파워 창업자의 방한을 계기로 국내 기업들의 차세대 소형모듈원자로(SMR) 사업 참여가 투자와 기술 검토 단계를 넘어 실제 공급망과 사업개발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지난해 방한 당시 차세대 원전 협력 가능성을 논의하는 수준이었다면 올해는 미국에서 테라파워의 첫 상업 규모 첨단원전 건설이 본격화하면서 국내 기업들이 구체적인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는 점이 다르다. 특히 SK이노베이션은 테라파워와 글로벌 공동사업의 주요 조건에 합의했고, HD현대와 두산에너빌리티는 원자로와 핵심 기자재 제작을 맡는 구조를 갖추면서 한국 기업들의 참여 방식도 보다 선명해지고 있다.
<>‘투자’에서 ‘사업’으로… SK이노베이션의 역할 확대
14일 빌 게이츠 이사장은 조정식 국회의장과 한성숙 국무총리,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 등을 잇달아 만나 테라파워의 SMR 사업에 한국 기업의 참여를 확대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김 장관은 테라파워의 표준화된 원자로 설계와 한국의 원전 제조·건설 공급망을 결합할 경우 SMR의 경제성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대기업뿐 아니라 국내 중소·중견 원전 기업들도 테라파워 공급망에 참여할 수 있도록 관심을 당부했다.
정부와 테라파워 간 논의 직후에는 테라파워와 SK이노베이션의 글로벌 공동사업 추진을 위한 주요 조건 합의서가 체결됐다.
이번 합의는 SK가 테라파워에 투자한 기존 관계를 실제 사업으로 확대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양사는 미국에서 건설 중인 실증로와 후속 상용 프로젝트에 SK이노베이션의 참여를 확대하는 한편 국내 공급망 활용, 국내 나트륨 SMR 사업 개발, 해외 프로젝트 공동 발굴 등을 검토하기로 했다.
SK와 테라파워의 관계는 이미 수년 전부터 이어져 왔다. SK㈜와 SK이노베이션은 2022년 테라파워에 총 2억5000만달러를 투자했고, 이후 한국수력원자력과 함께 차세대 SMR 사업화 협력도 추진해왔다. 이번 합의를 통해 재무적 투자자에 가까웠던 기존 관계가 사업개발 파트너로 한 단계 확장되는 모양새다.
<>HD현대는 ‘제조’, 두산은 ‘핵심 기자재’ 맡는다
HD현대는 테라파워의 나트륨 원자로 상용화 과정에서 제조 부문의 역할을 확대한다. 정기선 HD현대 회장은 14일 빌 게이츠 이사장, 크리스 르베크 테라파워 최고경영자, 이한우 현대건설 대표와 만나 육상 원자로 상용화를 위한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현재 HD현대는 테라파워 원자로 용기 1기를 제작하고 있으며, 향후 연간 2~3기의 원자로 용기를 공급할 수 있는 생산체계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앞서 체결한 협력 구상에서는 테라파워가 원자로 기술을 제공하고 HD현대가 주기기 제조, 현대건설이 EPC를 담당하는 역할 분담도 제시됐다.
두산에너빌리티는 보다 구체적인 제작 계약을 확보했다. 테라파워의 나트륨 원자로에 들어가는 원자로 보호용기와 원자로 지지구조물, 원자로 내부구조물 등 핵심 기자재를 제작하기로 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2024년 말 테라파워와 초도 SMR 핵심 기자재 제작성 검토 계약을 맺은 뒤 설계 개선 작업을 진행해왔다. 이번 계약으로 설계 단계에서 구축한 협력 관계가 실제 기자재 공급으로 이어졌다.
이를 종합하면 국내 기업들의 역할은 사업개발(SK이노베이션), 원자로 및 주기기 제조(HD현대), EPC(현대건설), 핵심 기자재 제작(두산에너빌리티)으로 나뉘는 구조다. 테라파워가 원자로 설계를 담당하고 한국 기업들이 제조와 건설 역량을 보태는 형태다.
<>테라파워가 달라졌다… ‘설계회사’에서 실제 건설 단계로
국내 기업들의 참여가 빨라진 배경에는 테라파워 사업 자체의 진전이 있다. 테라파워는 지난 3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로부터 와이오밍주 케머러 1호기 건설허가를 받았다. 미국에서 상업 규모 첨단원자로가 건설허가를 받은 첫 사례다. 이후 4월에는 케머러 1호기 건설을 공식적으로 시작했다.
케머러 1호기에 적용되는 ‘나트륨(Natrium)’은 345MW급 소듐냉각고속로에 용융염 기반 에너지저장 시스템을 결합한 설계다. 저장 시스템을 활용하면 필요할 때 출력이 최대 500MW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설계됐다. 테라파워는 이 프로젝트를 2030년 완공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
이는 그동안 SMR 업계가 안고 있던 가장 큰 불확실성 가운데 하나인 ‘실제 건설 가능성’에 대한 검증이 시작됐다는 의미가 있다.
특히 테라파워는 설계 개발과 규제 절차를 동시에 진행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실제 기자재 조달과 시공으로 사업의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한국 기업 입장에서도 단순히 미래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투자가 아니라 향후 반복 수주가 가능한 공급망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 셈이다.
<>AI 시대 전력 수요가 SMR 시장 키운다
SMR이 다시 주목받는 배경에는 인공지능(AI) 산업의 급격한 성장도 자리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는 대규모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아야 하는 만큼 태양광이나 풍력처럼 출력 변동성이 있는 전원만으로 수요를 충당하기 어렵다. 이에 따라 24시간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으면서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는 원전이 데이터센터 전력원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
테라파워 역시 나트륨 원자로를 안정적인 기저전력과 출력 조절이 가능한 전원으로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에너지저장 시스템을 결합해 전력 수요가 급증할 때 출력을 높이는 구조를 채택했다.
글로벌 SMR 시장에서는 이미 여러 노형이 상용화를 놓고 경쟁하고 있다. 기술 방식과 규제 환경, 경제성, 연료 확보, 공급망 구축 여부에 따라 시장의 승자가 갈릴 가능성이 큰 만큼 실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공급망을 확보한 기업들의 경쟁력이 중요해질 전망이다.
<>한국에는 ‘수출형 원전 생태계’ 확장 기회
이번 테라파워와 국내 기업들의 협력은 한국 원전 산업에도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대형 원전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은 설계·제작·건설·운영에 이르는 공급망을 구축해왔지만, SMR 시장에서는 아직 글로벌 표준이 확립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 때문에 특정 노형의 초기 공급망에 얼마나 빨리 참여하느냐가 향후 시장 지위를 좌우할 수 있다.
산업부 역시 현재를 해외 SMR 공급망 진입의 적기로 보고 있다. 테라파워의 표준설계와 한국의 제조·건설 역량을 결합하면 국내 기업이 단순 기자재 공급을 넘어 글로벌 SMR 프로젝트 전반으로 사업 영역을 넓힐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다.
다만 과제도 남아 있다. SMR은 아직 대형 원전만큼 상업적 운영 실적이 축적되지 않았고, 초기 건설비와 규제 절차, 연료 공급망 등에서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특히 미국에서 첫 프로젝트가 실제 일정과 비용에 맞춰 진행되는지가 후속 프로젝트 확대의 중요한 기준이 될 전망이다.
한국 기업들 역시 테라파워와의 협력을 곧바로 대규모 매출로 연결하기보다는 초도 프로젝트에서 제작·공급 경험을 축적하고, 이를 후속 호기와 해외 프로젝트 수주로 확대하는 전략이 중요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결국 이번 빌 게이츠 방한에서 주목할 부분은 유명 인사의 방한 자체보다 테라파워와 한국 원전 산업 간 협력이 실제 계약과 공급망 구축 단계로 이동했다는 점이다. 테라파워의 첫 상업 규모 프로젝트가 건설 단계에 들어간 가운데 SK이노베이션, HD현대, 현대건설, 두산에너빌리티가 각각 사업개발과 제조, EPC, 핵심 기자재 영역을 맡으면서 ‘K-SMR’의 해외 진출 경로도 구체화되고 있다.
향후 케머러 1호기의 건설 진행과 후속 상용 프로젝트 확보 여부가 국내 기업들의 공급망 참여가 일회성에 그칠지, 새로운 원전 수출 모델로 자리 잡을지를 가르는 핵심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