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화강재·고강도 형강 앞세워 콘크리트 중심 데이터센터 건설시장 공략
인공지능(AI) 확산이 반도체와 전력산업을 넘어 철강산업에도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있다. 대규모 AI 데이터센터 건설이 늘어나면서 건물의 골조부터 전력설비를 지지하는 구조물까지 철강재를 적용할 수 있는 영역이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제철이 이 시장을 새로운 고부가 강재 수요처로 점찍고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다.
단순히 데이터센터 건설 현장에 철강재를 공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프로젝트 설계 단계부터 참여해 내화강재와 고강도 형강 등 자사 제품을 적용하는 방식이다. 기존 제품을 판매한 뒤 수요처를 찾는 방식에서 한발 더 나아가 건축 구조 자체에서 새로운 철강 수요를 만들어내겠다는 전략으로 읽힌다.
현대제철은 이를 위해 국내 건설사업관리(PM) 분야 선두 업체인 한미글로벌과 건설 분야 기술 경쟁력 강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양사는 지난 19일 경기도 성남시 현대제철 판교오피스에서 협약을 맺고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생산시설 등 첨단 산업시설에 적용할 수 있는 강구조 모델을 공동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핵심은 ‘설계 단계’다.
현대제철이 보유한 내화강재와 고강도 형강 등 건설용 강재의 특성을 프로젝트 초기부터 분석하고, 이를 건축 설계에 반영해 고객에게 시설별로 최적화된 강구조 모델을 제안하는 방식이다.
철강업체가 완성된 설계에 맞춰 제품을 공급하는 기존 방식과 달리 어떤 구조와 강종을 사용할 것인지 결정하는 초기 단계부터 참여하는 것이다.
현대제철 입장에서는 프로젝트 한 건에 다양한 강종을 동시에 공급하는 ‘토털 패키지’ 전략을 확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데이터센터는 현대제철이 주목하는 시장이다.
그동안 데이터센터 건물은 프리캐스트 콘크리트(PC)나 포스트텐션(PT) 등 콘크리트 기반 구조가 주로 사용됐다.
프리캐스트 콘크리트는 공장에서 미리 제작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이며, 포스트텐션은 콘크리트 내부에 고강도 강선을 넣어 구조물의 지지력을 높이는 공법이다.
하지만 AI 데이터센터 건설 경쟁이 빨라지면서 건설기간 자체가 사업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데이터센터 사업자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토지와 전력, GPU 등 설비를 확보하기 때문에 시설 가동 시점을 앞당길수록 투자 회수 시기도 빨라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공사기간 단축과 시공 효율성 측면에서 장점을 갖는 강구조 방식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현대제철이 노리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강구조 적용이 확대될 경우 단순한 형강 수요 증가에 그치지 않고 화재에 견딜 수 있는 내화강재와 대형 구조물을 지지하는 고강도 강재 등 고성능 제품의 시장도 함께 커질 수 있다.
데이터센터를 새로운 철강 수요처로 보는 현대제철의 움직임은 이번 협약에서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현대제철은 지난 3월 ‘차세대 전력 인프라 판매 확대 TFT’를 신설했다.
AI 확산으로 데이터센터와 전력 인프라 투자가 동시에 증가할 것으로 보고 관련 철강 수요를 선제적으로 발굴하기 위한 조직이다.
공략 범위도 데이터센터 건물에 한정되지 않는다.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구조재와 내·외장재, 각종 설비를 지지하는 강재뿐 아니라 에너지저장장치(ESS) 인클로저와 송전철탑 등 전력을 생산·저장·전달하는 인프라 전반으로 철강 적용 영역을 넓히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AI 산업 성장의 수혜 범위가 예상보다 넓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AI 시장 초기에는 GPU와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반도체가 가장 먼저 주목받았다. 이후 막대한 전력 소비가 부각되면서 변압기와 전선, 발전설비가 새로운 수혜 산업으로 떠올랐다.
이제는 데이터센터 건물과 송전설비, ESS까지 투자가 확대되면서 이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철강재 역시 AI 인프라 공급망의 한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다.
현대제철에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국내 철강업계는 건설 경기 부진과 글로벌 공급과잉, 저가 수입재 유입 등으로 전통적인 수요산업에서 성장 동력을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따라서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 ESS, 송전 인프라처럼 투자가 확대되는 산업에서 고부가 강재 수요를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향후 제품 포트폴리오 경쟁력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특히 현대제철의 전략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강재 판매’보다 ‘솔루션’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데이터센터 사업자가 처음부터 특정 철강제품을 선택하도록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설계·건설 단계에서 강구조의 경제성과 시공성을 제시하고, 그 구조에 맞는 강재까지 패키지로 공급하는 방식이다.
한미글로벌과의 협업도 이 과정에서 의미가 있다.
한미글로벌이 보유한 건설사업관리 및 프로젝트 경험과 현대제철의 강재 기술을 결합하면 실제 데이터센터 프로젝트의 설계 단계에서 강구조 적용 가능성을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제철 관계자는 “한미글로벌과의 협업을 통해 데이터센터 등 첨단 산업시설용 강재에 대한 선도적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고 고성능 강재 수요를 창출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AI가 철강업체에 직접적인 기술 경쟁 상대를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AI가 필요로 하는 데이터센터와 전력망이 늘어날수록 이를 현실에 구축하는 데 필요한 소재의 양과 종류도 달라진다.
현대제철이 지난 3월 별도의 전력 인프라 TFT를 만들고 이번에는 설계·건설 전문기업과 손잡은 것도 이런 변화에 대응하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자동차와 전통 건설산업이 오랫동안 철강 수요를 이끌었다면 AI 시대에는 데이터센터와 전력 인프라가 또 하나의 수요산업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있다.
현대제철의 다음 과제는 이 가능성을 실제 수주와 고부가 강재 판매로 연결하는 것이다. 데이터센터의 ‘콘크리트 중심 구조’에 강재가 얼마나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느냐가 그 성과를 가늠할 첫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