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가 향후 반세기의 산업·에너지 지형을 바꿀 서부 신섬 건설을 추진한다. 로런스 웡 싱가포르 총리는 8월 23일 내셔널데이 랠리에서 주롱섬 남쪽의 세마카우와 부콤, 풀라우 수동 등 여러 섬을 수십 년에 걸쳐 하나의 대형 섬으로 통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새 섬에는 첨단 제조시설과 발전 인프라가 들어설 수 있으며 군사시설을 위한 공간도 유지된다. 웡 총리는 이곳을 인공지능(AI)이나 데이터센터 전용 단지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규모 연산시설 유치가 전력 가격과 공급량에 좌우되는 상황에서 이번 구상은 싱가포르 디지털 경제의 장기적인 기반을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읽힌다.
AI 인프라는 흔히 반도체와 모델, 데이터의 규모로 평가된다. 실제 시설의 가동 여부를 결정하는 조건은 발전설비와 송전망, 계통 접속 시점, 건설 기간이다. 첨단 GPU를 확보해도 수백 메가와트의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지 못하면 연산 자산을 운용할 수 없다. 전력계획과 디지털 산업정책을 분리하기 어려워진 이유다.
싱가포르 에너지시장청은 반도체와 데이터센터를 비롯한 전력 다소비 산업의 성장으로 향후 10년간 최대전력 수요가 매년 2.4~4.8% 증가할 것으로 전망한다. 2031년 최대전력 수요는 9.6~11.4GW에 이를 수 있다.
정부는 2031년 가동을 목표로 최소 600MW 규모의 수소 전환 대비형 복합화력발전기 1기와 2032년까지 최대 2기를 추가 건설하는 사업자를 모집했다. 2029년 가동 예정인 또 다른 600MW 발전기도 이미 사업자가 선정됐다. 싱가포르가 2025년 12월 두 번째 데이터센터 신청 절차를 통해 배정한 신규 데이터센터 용량이 최소 200MW라는 점을 고려하면, 연산시설을 확대하기 전에 확보해야 할 발전설비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문제는 발전량만이 아니다. 싱가포르는 전력 대부분을 수입 천연가스로 생산하기 때문에 국제 연료 가격과 지정학적 충격에 노출돼 있다. 2030년까지 태양광 설비를 3GWp로 확대할 계획이지만, 국내 태양광이 2050년 예상 에너지 수요에서 담당할 수 있는 비중은 약 10%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발전설비 증설과 함께 효율 향상도 핵심 과제로 부상했다. 싱가포르는 2025년 데이터센터 정보기술 장비의 에너지 효율 기준을 도입하고, 고효율 장비와 높은 운영 온도, 작업 통합, 장비 이용률 개선 등을 통해 최소 30%의 에너지 절감을 추진하고 있다. 국토와 에너지가 제한된 국가에서는 절약한 전력도 새로 확보한 인프라와 같은 역할을 한다.
50년의 국토계획과 분기 단위의 AI 기술
서부 신섬 계획의 핵심 변수는 시간이다. 매립과 섬 통합, 발전소 및 교통망 건설에는 수십 년이 필요하지만 AI 반도체와 냉각기술, 연산 구조는 분기 단위로 바뀐다. 따라서 신섬이 싱가포르의 당면한 데이터센터 부족을 해결할 수는 없다.
신섬의 전략적 가치는 장기적인 산업 선택권을 확보하는 데 있다. 향후 기술과 경제적 우선순위에 따라 발전과 에너지저장장치, 반도체, 첨단 제조시설 등을 유연하게 배치할 수 있다. 하나의 AI 기술 주기에 국가 인프라 전체에 걸기보다 전망이 빗나가도 활용할 수 있는 산업 기반을 미리 마련하는 방식이다.
이 구상은 주롱섬을 조성했던 산업 전략의 연장선에 있다. 싱가포르는 여러 섬을 통합해 정유와 석유화학, 에너지 교역을 결합한 산업 허브를 구축했고, 이는 수십 년 동안 국가경제를 지탱했다. 서부 신섬은 전력과 연산이 과거의 석유만큼 전략적인 자산으로 부상한 시대에 새로운 산업 기반을 마련하려는 시도다.
신섬이 완성되기 전까지 싱가포르는 역내 연계를 강화해야 한다. 조호르–싱가포르 특별경제구역은 싱가포르의 본사 기능과 금융, 연구개발, 지식재산 보호 역량을 조호르의 토지와 인력, 산업 기반과 결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이러한 ‘트위닝 모델’은 디지털 인프라에도 적용할 수 있다. 고부가가치 사업과 고객 관계는 싱가포르에 두고, 토지와 전력을 많이 사용하는 연산시설 일부는 조호르와 동남아시아의 다른 지역에 분산하는 구조다. 싱가포르는 모든 서버를 자국에 설치하지 않고도 역내 AI 인프라의 금융과 운영, 보안, 거버넌스를 담당하는 중심지가 될 수 있다.
다만 초국경 연산체계를 구축하려면 안정적인 통신망과 공동 전력개발, 사이버보안, 데이터 이동, 서비스 연속성에 관한 명확한 규칙이 필요하다. 데이터센터를 국경 밖으로 옮기더라도 해당 지역에서 전력과 용수, 송전망 부족이 다시 발생한다면 병목은 해소되지 않는다.
한국에 보내는 신호
싱가포르의 계획은 한국에도 직접적인 시사점을 제공한다. 한국은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과 강력한 디지털 경제를 보유하고 있지만, AI 산업 확대 과정에서 발전설비와 송전망, 전기요금, 데이터센터의 지역 집중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GPU 구매와 데이터센터 투자 발표만으로는 필요한 전력을 제때 공급할 수 없다.
AI 정책은 반도체와 데이터센터뿐 아니라 발전소, 송전망, 산업용지, 냉각설비를 하나의 인프라 체계로 다뤄야 한다. 정부와 산업계도 AI 인프라를 투자액이나 GPU 수량으로만 평가하지 말고, 전력의 공급원과 가격, 실제 공급 시점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
싱가포르의 서부 신섬은 아직 AI 섬이 아니며 하나의 산업만을 위해 조성되는 공간도 아니다. 이번 계획의 의미는 기술 경쟁력이 물리적 인프라 위에서 작동한다는 사실을 국가 차원에서 인정했다는 데 있다. 다음 단계의 AI 경쟁은 가장 뛰어난 반도체와 모델을 설계하는 국가뿐 아니라, 이를 지속적으로 가동할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국가가 주도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