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기아가 유럽 자동차 기술의 중심에서 특정 동력원에 집중하기보다 전기차(EV), 하이브리드(HEV), 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EREV), 수소전기차(FCEV)를 동시에 활용하는 ‘멀티 전동화’ 전략을 내놨다. 여기에 인공지능(AI)과 디지털 트윈을 연구개발에 접목해 자동차 기술 경쟁의 축을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와 데이터 영역으로 넓히겠다는 구상이다.
현대차·기아는 지난 5~7일 독일 아헨에서 열린 ‘아헨 콜로키움 2026’에 참가해 미래 모빌리티 전략과 핵심 기술을 공개했다.
이번 행사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현대차·기아가 처음으로 기조연설에 나섰다는 점이다. 1987년 시작된 아헨 콜로키움에서 현대차·기아가 기조연설을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기조연설자로 나선 만프레드 하러 현대차·기아 R&D본부장 사장은 자동차 산업이 하나의 기술만으로 미래를 결정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였다고 진단했다. 지역별 전동화 속도와 인프라, 소비자 요구가 서로 다른 만큼 다양한 동력원의 장점을 조합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대차·기아가 제시한 해법은 EV부터 HEV, EREV, FCEV까지 아우르는 xEV 포트폴리오다. 전기차 시장 성장세에 대응하면서도 충전 인프라와 주행거리 등 소비자의 현실적인 요구를 고려해 동력원별 경쟁력을 활용하겠다는 접근이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전략이 최근 글로벌 전기차 시장의 변화와 맞물린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기차 전환이라는 큰 방향은 유지되지만 국가와 지역별 보급 속도에 차이가 발생하면서 완성차 업체들이 다양한 파워트레인을 동시에 확보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조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기아는 전동화 전략과 함께 AI를 자동차 개발의 핵심 경쟁력으로 제시했다.
하러 사장은 AI가 엔지니어를 대체하는 수단이 아니라 엔지니어의 판단과 창의성을 확대하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설계와 시뮬레이션, 검증 등 개발 과정에 AI를 적극 활용해 연구개발 속도와 효율성을 끌어올리겠다는 의미다.
차량 개발 방식도 달라진다. 현대차·기아는 디지털 트윈과 가상 검증을 활용해 실제 차량 제작 이전 단계에서 다양한 조건을 시뮬레이션하고 개발 완성도를 높이는 체계를 추진하고 있다.
차량이 판매된 이후에도 소프트웨어와 데이터를 활용해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구조도 제시했다. 차량이 운전자의 주행 패턴과 선호도를 학습하고 이를 바탕으로 맞춤형 기능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차량에서 축적되는 데이터와 고객 경험을 다시 제품 및 서비스 개선에 활용하는 ‘데이터 플라이휠’ 구조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자동차를 완성품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판매 이후에도 데이터를 통해 성능과 서비스를 발전시키는 플랫폼으로 바라보는 셈이다.
기술 전시에서는 실제 개발 역량도 공개했다.
수소 분야에서는 고분자전해질막(PEM) 수전해 스택과 수소저장탱크, 디 올 뉴 넥쏘의 연료전지 시스템 등을 선보였다. 전동화 분야에서는 배터리 팩과 셀, 2-스테이지 모터 시스템, 차세대 하이브리드 시스템 변속기(TMED-II), 파워모듈 등을 전시했다.
단순히 기술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참가자들이 직접 차량을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디 올 뉴 넥쏘와 GV60 마그마를 활용해 행사장 주변 약 11~12km 코스를 주행하도록 해 수소전기차와 고성능 전기차 기술을 체험하도록 했다.
업계에서는 현대차·기아가 유럽의 대표적인 자동차 기술 콘퍼런스에서 기술 포트폴리오를 폭넓게 공개한 것을 두고 기술 기업으로서의 존재감을 높이려는 행보라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과거에는 완성차 업체의 기술 경쟁력이 엔진과 변속기, 차체 등 개별 하드웨어 기술에 의해 좌우됐다면 앞으로는 전동화 시스템과 배터리, AI, 소프트웨어를 얼마나 유기적으로 결합하느냐가 경쟁력을 가를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현대차·기아가 이번 행사에서 특정 기술 하나를 강조하기보다 전동화 포트폴리오와 수소, 배터리, AI, 디지털 개발 기술을 한꺼번에 선보인 것도 이런 산업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유럽 시장에서 전동화 전환 속도가 지역별로 달라지는 가운데 다양한 파워트레인을 동시에 확보하고, AI와 소프트웨어를 통해 차량 개발과 고객 경험을 고도화하는 ‘양손 전략’이 향후 글로벌 경쟁에서 어떤 성과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현대차·기아는 행사 마지막 날인 7일 수소, 전동화, 배터리를 주제로 한 기술 세션에도 참여한다. 수소연료전지의 발전 방향을 비롯해 xEV 기술 확대 전략과 차세대 배터리 기반 모빌리티 기술을 소개할 예정이다.
한편 아헨 콜로키움은 독일 아헨공과대학교(RWTH Aachen University) 산하 연구기관이 주관하는 자동차 기술 분야의 대표적인 유럽 콘퍼런스다. 올해 행사에는 완성차 업체와 부품기업, 대학 및 연구기관 관계자들이 참석해 미래 자동차 기술과 산업의 방향을 논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