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수입 반도체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27일 전해졌다. 미국 제조업을 되살리고 자국 내 반도체 생산을 확대하겠다는 취지지만, 이 정책이 과연 미국이 내세우는 인공지능(AI) 경쟁력 강화와 양립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세계 반도체 공급망을 압박한다고 미국의 기술 경쟁력이 저절로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반도체는 AI 산업의 핵심 인프라다. 엔비디아와 AMD 같은 미국의 반도체 설계 기업뿐 아니라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 등 빅테크 기업들도 막대한 반도체를 필요로 한다.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반도체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면 그 비용은 결국 미국 기업과 소비자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비싼 반도체는 데이터센터 구축 비용을 높이고 AI 서비스 경쟁력에도 부담이 된다.
더 큰 문제는 관세가 미국 내 생산 확대를 단기간에 만들어주는 만능 해법처럼 여겨지고 있다는 점이다. 반도체 공장은 관세율을 높인다고 곧바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막대한 투자금과 숙련 인력, 안정적인 전력과 용수, 신속한 인허가, 소재·장비 공급망이 모두 필요하다. 공장을 짓고 생산 수율을 안정화하기까지 수년이 걸리는 산업이다.
그런 점에서 관세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미국이 정말 반도체 제조 기반을 강화하고 싶다면 기업들이 미국에서 생산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합리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환경부터 만들어야 한다. 전문인력 양성, 인프라 확충, 세제 지원, 인허가 개선 등이 보다 근본적인 해법이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관세가 동맹국의 대미 투자를 끌어내기 위한 압박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이다. 한국과 일본, 대만 등 반도체 강국에 높은 관세를 제시한 뒤 미국 내 투자 규모에 따라 면제나 감면 혜택을 주는 방식이라면 기업의 자율적인 투자 판단을 사실상 제한할 수 있다.
한국 기업들도 이미 미국 내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인디애나주에 차세대 반도체 패키징 생산거점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 대표적이다. 미국으로서는 동맹국의 자본과 기술을 활용해 자국 반도체 생태계를 강화할 수 있는 기회다. 그런데 투자 기업에 다시 관세 부담을 지운다면 미국의 정책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반도체 산업의 특성도 고려해야 한다. 현재는 AI 열풍으로 HBM 등 첨단 메모리 수요가 크게 늘고 있지만 업황은 언제든 공급과잉과 가격 하락 국면으로 돌아설 수 있다. 정치적 압박 때문에 기업이 과도한 투자를 단행했다가 시장이 꺾이면 그 부담은 결국 기업과 투자자에게 돌아간다.
무엇보다 AI 패권을 목표로 한다면 미국에 필요한 것은 비싼 반도체가 아니라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최고 수준의 반도체다. 반도체 가격을 끌어올려 미국 기업의 비용 부담을 키우는 정책은 AI 산업 육성이라는 목표와 모순될 수 있다.
미국이 제조업 부활을 추진하는 것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경쟁력을 높이는 방법은 기업을 관세로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투자하고 생산할 유인을 만드는 데 있어야 한다.
반도체 공급망은 어느 한 나라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설계는 미국이 강하지만 제조와 장비, 소재, 패키징에서는 한국·대만·일본 등 동맹국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이들과 협력해 공급망을 안정시키는 것이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도 부합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진정으로 미국의 AI 경쟁력을 강화하고 싶다면 동맹국을 압박하는 관세 정책부터 재고해야 한다. 관세는 단기적으로 미국 내 투자를 유도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공급망의 효율성과 정책 신뢰를 훼손할 수 있다.
AI 시대의 경쟁은 국경을 닫는다고 이기는 게임이 아니다. 기술과 인재, 자본과 공급망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연결하느냐가 승패를 가른다. 미국이 진정한 AI 강국으로 남으려면 ‘미국 우선’이라는 구호에 머물 것이 아니라 동맹과 함께 반도체 생태계를 키우는 전략을 선택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