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태 칼럼 7 | 정여창과 남계서원 — 지방에서 꽃핀 선비정신
정연태 칼럼 7 | 정여창과 남계서원 — 지방에서 꽃핀 선비정신
  • Korea IT Times 편집국
  • Published 2026.09.22 19:40
  • Comments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네스코가 인정한 한국의 정신문화, 서원을 찾아서

선비의 길을 따라 걷는 세계유산 기행

남계서원, 바른 삶이 곧 학문이었던 일두 정여창의 길

 

연재 순서

이 연재는 아홉 개의 서원을 소개하는 문화유산 기행을 넘어, 한국 정신문화 700년의 흐름을 따라가는 인문학 여정이다.

제1편 | 왜 세계는 한국의 서원에 주목했는가

제2편 | 안향과 소수서원 — 한국 교육의 시작

제3편 | 퇴계 이황과 도산서원 — 공부는 어떻게 사람을 만드는가

제4편 | 류성룡과 병산서원 — 국가를 지킨 선비의 리더십

제5편 | 회재 이언적과 옥산서원 — 자연에서 완성한 철학

제6편 | 김굉필(金宏弼)과 도동서원 — 도학의 뿌리

제7편 | 정여창과 남계서원 — 지방에서 꽃핀 선비정신

제8편 | 김인후와 필암서원 — 청렴한 지성의 힘

제9편 | 최치원과 무성서원 — 통합의 사상

제10편 | 김장생과 돈암서원 — 예학이 만든 공동체

제11편 | 서원은 과거의 유산인가, 미래의 학교인가

 

글 | 정연태 건설산업정보원 원장

 

제7편 | 남계서원(灆溪書院)

지리산 자락에서 만나는 오래된 질문

경상남도 함양의 들판을 지나 남계서원으로 들어서면 화려한 궁궐이나 웅장한 사찰에서 느끼는 감탄과는 다른 마음이 찾아온다. 낮은 담장과 단정한 기와지붕, 앞으로 흐르는 물과 멀리 이어지는 산줄기 사이에 서원은 조용히 앉아 있다. 사람을 압도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찾아온 사람에게 한 가지 질문을 건넨다. “그대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남계서원은 지식을 많이 쌓은 사람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곳만은 아니다. 이곳은 자신이 배운 도리를 삶으로 실천하고, 권력보다 양심을 앞세우며, 불의한 시대에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한 선비를 기억하는 공간이다. 그 선비가 바로 일두 정여창이다.

남계서원은 1552년, 조선 명종 7년에 함양의 유림들이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후학을 교육하기 위해 세웠다. 영주의 소수서원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건립된 서원으로 평가되며, 조선 서원 건축과 운영 체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566년에는 조정으로부터 ‘남계’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남계서원이 세계유산으로 인정받은 이유는 오래된 건축물이라는 사실에만 있지 않다. 이곳에는 조선 선비들이 학문을 배우고, 스승을 기억하며, 자연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지역사회의 도덕적 질서를 세우려 했던 정신이 살아 있다. 남계서원은 건물이 아니라 삶의 태도를 보존한 곳이다.

남계서원의 주인공, 일두 정여창

정여창은 1450년에 태어나 1504년에 세상을 떠난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하동이며, 자는 백욱, 호는 일두이다. 그는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계보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았고, 훗날 문묘에 배향된 동방오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받았다.

‘일두’라는 호에는 흥미로운 사연이 담겨 있다. 일두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한 마리 좀벌레’라는 뜻이다. 자신의 학문과 존재를 크게 내세우기보다, 드넓은 천지와 성현의 도 앞에서 자신을 작은 존재로 낮춘 겸양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를 작게 불렀다고 해서 그의 삶까지 작았던 것은 아니다.

정여창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고, 학문에 뜻을 두어 점필재 김종직에게 배웠다. 김종직의 문하에는 김굉필, 남효온, 김일손 등 조선 전기 사림의 정신을 이끌었던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권력과 공신 중심으로 운영되던 훈구 정치에 맞서 도덕과 명분, 공론에 기초한 정치를 추구했다.

정여창에게 학문은 과거시험을 위한 지식이 아니었다. 학문은 욕망을 절제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며,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을 찾는 일이었다. 그는 경전을 읽는 것과 실제 생활을 분리하지 않았다. 부모를 섬기고, 이웃과 신의를 지키며, 백성의 고통을 살피고, 벼슬에 나아가서는 공적인 책임을 다하는 것이 모두 학문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남계서원이 오늘날까지 깊은 울림을 주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정여창의 학문은 말보다 삶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벼슬보다 학문을 먼저 생각한 선비

정여창은 1490년 문과에 급제한 뒤 관직에 나아갔다. 세자시강원 설서 등 여러 직책을 맡아 왕세자를 가르치고, 안음현감으로 지방행정을 담당하기도 했다. 안음은 오늘날의 함양과 거창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그는 이곳에서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고, 교육을 장려하며, 지방관으로서 청렴한 정치를 실천하고자 했다.

조선의 선비에게 벼슬은 개인의 성공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상적으로 말하면 벼슬은 배운 도리를 세상에 실천하는 통로였다. 그러나 실제 정치의 세계는 학문에서 말하는 도덕적 질서와 크게 달랐다. 왕실과 공신, 훈구세력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고, 바른말을 하는 사림은 늘 정치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정여창은 권력의 중심으로 나아가 출세하는 길보다 자신의 뜻을 지키는 길을 택했다. 그는 벼슬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정치 현실이 자신의 이상과 맞지 않을 때에는 물러나 학문과 수양에 힘썼다. 그에게 물러남은 패배가 아니었다. 불의한 권력에 자신을 맡기지 않는 것도 선비가 지켜야 할 하나의 선택이었다.

무오사화, 글이 죄가 된 시대

1498년 연산군 때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무오사화는 김일손이 사초에 수록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김종직은 중국 초나라 의제를 애도하는 형식을 빌려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했다. 이미 세상을 떠난 김종직은 무덤에서 시신이 꺼내져 형벌을 받았고, 그의 제자들과 사림계 인사들이 대대적으로 처벌되었다.

정여창도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화를 피하지 못했다. 그는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조선의 남쪽 함양에서 북쪽 끝 함경도의 종성까지 끌려간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니었다. 가족과 고향, 학문 공동체로부터 떼어놓는 정치적 추방이었다.

그러나 유배는 그의 정신까지 꺾지 못했다. 정여창은 척박한 유배지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학문을 이어갔다. 성리학에서 중요한 것은 외부 환경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는 일이었다. 권력은 그의 몸을 변방으로 보낼 수 있었지만, 그가 지키려 한 도리까지 빼앗을 수는 없었다.

죽음 뒤에도 끝나지 않은 사화

정여창은 1504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4세였다. 그러나 그의 고난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해 갑자사화가 다시 일어나면서 정여창은 이미 죽은 사람임에도 부관참시를 당했다.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훼손하는 극형이었다.

연산군 시대의 정치적 폭력이 얼마나 잔혹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살아 있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데서 멈추지 않고 죽은 사람의 명예와 기억까지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권력자의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반정이 일어난 뒤 정여창의 명예는 회복되었다. 그의 학문과 삶은 다시 평가받았으며, 후대 사림은 그를 조선 성리학의 중요한 스승으로 추앙했다. 권력은 한 시대의 기록을 지울 수 있지만, 올바른 삶이 남긴 흔적까지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 남계서원은 바로 그 사실을 증명하는 공간이다.

함양 유림이 세운 기억의 집

정여창이 세상을 떠난 지 48년이 지난 1552년, 함양의 유림들은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남계서원을 세웠다. 서원은 국가가 명령하여 세운 관립학교가 아니었다. 지역의 선비들이 뜻을 모아 토지를 마련하고, 건물을 짓고, 스승을 모시며, 후학을 가르친 자발적인 학문 공동체였다.

남계서원의 창건은 한 인물에 대한 추모를 넘어서는 의미를 지닌다. 함양의 선비들은 정여창의 삶을 지역 공동체가 따라야 할 도덕적 기준으로 선택했다. 권력에 굴복하지 않았던 그의 삶, 배운 것을 실천하려 했던 태도, 백성을 생각했던 마음을 후대에 전하고자 했다.

1566년 조정은 ‘남계’라는 이름을 내리고 서원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사액은 단순히 현판 하나를 내려주는 일이 아니었다. 국가가 그 서원의 교육적·도덕적 권위를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남계서원은 지방에서 시작된 기억이 국가적 기억으로 확장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전쟁으로 불타고 다시 일어서다

남계서원의 역사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서원은 불에 타 사라졌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조선의 국토뿐 아니라 수많은 문화유산과 기록, 교육공간을 파괴했다. 그러나 함양의 유림은 서원을 포기하지 않았다.

1603년 나촌으로 옮겨 복원했다가, 1612년 다시 원래의 터인 현재 위치에 중건했다. 이후 강익과 정온이 본사에 추가로 배향되었고, 별사에는 유호인과 정홍서 등이 모셔졌다. 별사는 1868년 서원 정리 과정에서 철폐되었다.

전쟁으로 건물이 사라졌어도 사람들은 그 안에 담긴 정신을 다시 세웠다. 남계서원의 진정한 역사는 기와와 목재의 역사만이 아니다. 파괴될 때마다 다시 일으켜 세운 사람들의 기억과 의지의 역사이다.

앞에서 배우고 뒤에서 스승을 모시다

남계서원 건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전학후묘의 배치이다. 전학후묘란 앞쪽에 학문을 배우는 강학공간을 두고, 뒤쪽에 선현의 위패를 모시는 제향공간을 두는 구성이다. 남계서원은 이러한 서원 건축의 전형을 이른 시기에 확립하여 후대 서원 건축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입구를 지나면 먼저 누각인 풍영루를 만난다. ‘풍영’이라는 말은 바람을 쐬며 시를 읊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단순히 경치를 구경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마음을 열고 성현의 도를 되새기는 풍류를 의미한다.

현재의 풍영루는 1847년 화재 이후 1849년에 중건한 건물로 알려져 있다. 누각의 앞에는 ‘풍영루’, 안쪽에는 ‘준도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준도는 도를 따른다는 뜻이다. 서원에 들어가는 행위가 곧 바른 도리를 따르겠다는 마음의 다짐임을 보여준다.

풍영루를 지나면 강학의 중심인 명성당이 나타난다. 명성당은 유생들이 모여 경전을 읽고, 스승의 강의를 듣고, 학문을 토론하던 공간이다. 이름에는 인간이 본래 지닌 밝은 본성을 드러내고 완성해 간다는 뜻이 담겨 있다.

강당 좌우에는 유생들이 생활하던 동재와 서재가 자리한다. 양정재와 보인재이다. 이곳에서 유생들은 잠을 자고 글을 읽으며 공동생활을 했다.

서원 교육은 오늘날의 교실 수업과 달랐다. 공부하는 시간과 생활하는 시간이 분리되지 않았다. 말하는 태도, 어른을 대하는 예절, 친구와 지내는 방식, 새벽에 일어나고 밤에 잠드는 습관까지 모두 수양의 과정이었다. 배움은 책상 위에만 있지 않았다. 삶 전체가 교과서였다.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사당

강학공간을 지나 뒤쪽으로 올라가면 정여창을 비롯한 선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나타난다. 사당이 강당보다 높은 곳에 놓인 것은 단순한 지형상의 선택이 아니다. 학문이 스승의 정신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상징적 질서를 보여준다.

앞에서는 배우고, 뒤에서는 기억한다. 강당에서 배운 학문은 사당에 모신 선현의 삶과 연결되어야 했다. 지식이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참된 학문이라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공간 속에 새겨져 있다.

서원의 제향은 단순한 조상숭배가 아니었다. 후학들은 제사를 통해 스승의 삶을 다시 기억하고, 자신이 그 가르침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았다. 제향은 과거를 숭배하는 의례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자신을 심판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서원은 학교와 사당이 결합된 독특한 공간이 되었다. 배움과 기억, 지식과 도덕, 현재와 과거가 한 장소에서 이어졌다.

자연은 서원의 또 다른 스승이었다

남계서원은 자연과 떨어진 채 존재하지 않는다. 앞으로는 물길과 들판이 펼쳐지고, 뒤와 옆으로는 산세가 이어진다. 건물은 자연을 지배하려 하지 않고 지형의 흐름에 자신을 맞춘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자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었다. 흐르는 물을 보며 쉼 없이 자신을 새롭게 하는 자세를 배웠고, 산을 보며 흔들리지 않는 절개를 생각했다. 바람과 달, 나무와 계절은 모두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서원 건축은 자연을 건물 안으로 끌어들인다. 누각에 앉으면 시야가 열리고, 마당을 지나면 산과 하늘이 건축의 일부처럼 들어온다. 담장은 자연을 완전히 차단하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경계를 만든다.

이러한 자연과 건축의 관계는 한국 서원의 중요한 특징이다. 유네스코는 한국의 서원 9곳이 산과 물에 가까운 입지를 선택하고, 경관을 학문과 심신수양의 일부로 활용했다는 점을 중요한 가치로 평가했다. 서원은 자연 속에서 성리학적 인간을 길러내기 위해 설계된 교육문화 경관이었다.

남계서원을 걷는다는 것은 건물만 보는 일이 아니다. 옛 선비들이 바라보았던 물과 산, 바람과 하늘을 함께 바라보는 일이다.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은 까닭

조선 후기로 가면서 서원은 크게 늘어났다. 일부 서원은 학문과 교육의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지역 양반의 세력 기반이 되거나, 세금과 군역을 피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서원 사이의 붕당 갈등과 남설 문제도 심각해졌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1860년대 후반 전국의 서원을 대대적으로 정리했다. 수백 곳의 서원이 철폐되고 47개소만 남았다. 남계서원은 그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존속했다. 국가유산포털 역시 남계서원이 서원 철폐 때에도 존속한 주요 서원임을 밝히고 있다.

남계서원이 살아남은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일두 정여창이 지닌 학문적 위상, 서원의 오랜 역사, 지역사회에서 담당해 온 교육과 제향의 역할이 함께 인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철폐령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남계서원이 단순한 지역 서원이 아니라 조선 유학의 정통성과 역사성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평가받았음을 보여준다.

유네스코가 인정한 한국의 서원

남계서원을 포함한 아홉 곳의 서원은 2019년 7월 6일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등재 대상은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이다.

유네스코는 이들 서원을 조선시대 성리학 교육기관을 대표하는 연속유산으로 평가했다. 아홉 서원은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 한국에서 성리학이 지역사회에 뿌리내리고, 교육과 제향, 학문 교류를 통해 독자적인 문화로 발전한 과정을 보여준다.

유네스코가 특히 주목한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제향이다. 서원은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이를 통해 스승의 학문과 삶을 공동체의 기억으로 계승했다.

둘째는 강학이다. 서원은 경전을 읽고 토론하며 후학을 길러내는 교육기관이었다.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도덕적 인간을 형성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셋째는 교류와 유식이다. 선비들은 서원에 모여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지으며 자연 속에서 마음을 쉬게 했다. 누각과 정원, 물과 산은 이러한 교류와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었다.

남계서원은 이 세 기능을 모두 보여주는 초기 서원의 대표 사례이다. 유네스코 등재구역에서 남계서원의 핵심 유산구역은 약 4.11헥타르이며, 주변에는 약 78.67헥타르의 완충구역이 설정되어 있다. 이는 건물뿐 아니라 서원을 둘러싼 자연경관과 역사적 환경까지 함께 보존해야 한다는 뜻이다.

남계서원이 보여주는 한국 성리학의 특징

성리학은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조선에 들어와 한국적 모습으로 발전했다. 한국의 서원은 중국의 교육제도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아니었다. 지역의 선비들이 자발적으로 세우고 운영했으며, 특정 학자의 삶과 학문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했다.

남계서원은 이러한 한국적 성리학 문화의 초기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곳에서 학문은 개인의 출세를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고, 가족과 이웃에게 책임을 다하며, 공공의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길이었다.

정여창의 삶은 그 이상을 상징한다. 그는 정치적으로 성공한 인물이라기보다 정치적 박해를 받은 인물이다. 많은 저술과 제도를 남긴 권력자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후대 사람들은 그를 기억했다.

그가 지키려 했던 양심과 절개가 한 시대의 권력보다 오래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남계서원은 성공한 사람을 기리는 기념관이 아니다. 바르게 살고자 했던 사람의 마음을 기리는 장소이다.

오늘날 다시 묻는 선비의 길

우리는 지식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손안의 기기 하나만으로 과거 어느 시대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인공지능은 인간이 오랫동안 축적한 지식을 빠르게 정리하고 재구성한다. 그러나 지식이 많아졌다고 해서 인간이 반드시 더 현명해진 것은 아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행동하지 못하고, 공공의 이익보다 개인의 유불리를 먼저 계산하며, 진실보다 편리한 말을 선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 점에서 남계서원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새롭다. 배운 것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정여창에게 학문은 머릿속에 저장된 지식이 아니었다. 옳지 않은 권력 앞에서 물러설 줄 아는 용기였고, 외로운 유배지에서도 마음을 잃지 않는 절제였으며, 죽은 뒤 명예가 짓밟혀도 후대가 다시 찾아낼 수밖에 없는 삶의 진실이었다.

오늘의 교육은 더 많은 지식을 가르치지만, 그 지식을 어떤 마음으로 사용해야 하는지는 충분히 묻지 못할 때가 많다. 인공지능 시대일수록 남계서원의 가르침은 더욱 중요해진다. 기계는 지식을 생성할 수 있지만 삶의 책임까지 대신 질 수는 없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바른 삶이 남긴 오래된 향기

남계서원의 마당을 천천히 걷는다. 풍영루를 지나 명성당 앞에 서고, 유생들이 머물렀던 재사를 바라본 뒤, 가장 높은 곳의 사당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앞에서는 배우고 뒤에서는 스승을 기억하는 길이다. 그 길은 곧 한 인간이 성장하는 순서와도 닮았다.

먼저 세상의 이치를 배우고, 자신보다 앞서 바른 삶을 살았던 사람을 기억하며, 마침내 자신도 누군가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정여창의 육신은 사화의 광풍 속에서 훼손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함양의 선비들은 그 마음을 서원으로 세웠고, 후대 사람들은 무너진 서원을 다시 일으켰다. 전쟁도, 정치적 탄압도, 서원 철폐령도 그 기억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오늘날 남계서원은 세계유산이 되어 인류가 함께 지켜야 할 문화유산으로 남았다.

그러나 세계유산이라는 이름보다 더 소중한 것은 이곳에 남아 있는 한 가지 믿음이다. 바르게 산 사람의 삶은 당대에는 패배한 것처럼 보여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이다. 남계서원에서 만나는 선비의 길은 과거로 향하는 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묻는 길이다.

산은 말없이 서 있고 물은 쉬지 않고 흐른다. 그 사이에 자리한 남계서원은 지금도 조용히 말한다. 학문은 아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배운 것을 삶으로 지켜낼 때 비로소 한 사람의 길이 되고, 한 시대의 정신이 되며, 오래도록 남을 문화가 된다.

다음 편 예고

제8편 | 김인후와 필암서원 — 청렴한 지성의 힘

남계서원이 불의한 권력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은 정여창의 삶을 기억하는 곳이라면, 필암서원은 학문과 절의, 청렴을 지킨 하서 김인후의 정신을 계승한 공간이다. 다음 여정에서는 조선 성리학의 깊이를 더한 김인후의 학문과 인종에 대한 의리, 권력에서 물러나 후학을 길러낸 삶을 살펴본다. 필암서원이 한 선비의 청렴한 지성을 지역의 교육 전통으로 이어온 과정도 함께 만나본다.
.
필자 소개

정연태(필명: 만리풍취)는 문화사상가이자 정책전략가다. 역사와 철학, 과학기술을 연결하는 융합적 관점에서 한국의 전통문화를 현대 문명과 AI 시대의 미래 가치로 재해석하는 연구와 집필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영문버전 보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Comments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Independent journalism on technology, industry and the forces reshaping Korea and the world.
  • Korea IT Times Co., Ltd. | 34 Gukjegeumyung-ro 8-gil, Yeongdeungpo-gu, Seoul, Republic of Korea
  • Business Registration No. 206-86-32195
  • Tel. +82-2-578-0434 | 010-2442-9446 | info@koreaittimes.com
  • Publisher & Editor-in-Chief: Younsoo Chung | Youth Protection Manager: Choul-woong Yeon
  • ©2004–2026 Korea IT Times. All rights reserved.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