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해협이 다시 세계 경제의 가격 결정권을 쥐기 시작했다. 이란 의회가 미국과 이스라엘 선박의 해협 통과를 제한하는 법안을 검토한다는 소식에 8월 6일 브렌트유는 하루 만에 3.83% 오른 배럴당 82.49달러를 기록했다. 세계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 수송량의 약 20%가 이 해협을 통과한다는 점에서, 통항 제한은 에너지 가격과 해상운임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변수다.
한국이 이 사태를 단순한 국제유가 뉴스로만 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 한국은 원유 도입량의 약 70%를 중동에 의존하며, 중동산 원유 대부분이 호르무즈 해협을 거쳐 들어온다. 따라서 해협의 불안은 정유와 석유화학을 넘어 전력·물류·반도체 원료 가격까지 상승시켜 AI 산업 전반의 비용 부담을 높인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25년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원유는 하루 약 2,000만 배럴에 달했다. 이 가운데 약 80%가 아시아로 향했다. 같은 해 이 해협을 통과한 LNG도 1,100억㎥를 넘었으며, 이 물량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수송로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반도체 비용은 전력과 소재에서 먼저 드러난다
반도체 산업에 대한 첫 번째 충격은 전력비다. 첨단 반도체 공장은 웨이퍼 가공, 극자외선 노광, 공정가스 관리, 초순수 생산과 클린룸 유지에 막대한 전력을 사용한다. LNG 가격과 국내 발전 비용이 상승하면 그 부담은 전기요금과 산업용 전력 조달 비용을 통해 반도체 생산원가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AI 데이터센터도 같은 비용 압력에 놓인다. AI 연산 수요가 급증하면서 데이터센터 전력 확보가 국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부상했지만, 한국은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수입에 의존한다. 원유와 LNG 가격 상승이 발전 비용을 끌어올리면 AI 반도체 생산과 데이터센터 운영 비용이 동시에 상승하는 이중 부담이 발생한다.
산업연구원은 지난 3월 발표한 시나리오 분석에서 에너지 가격 충격이 한국 제조업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단기 공급 충격이 발생하면 제조업 생산비가 5.4%, 장기 충격이 이어지면 최대 11.8% 상승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충격은 정유와 전력에서 시작해 화학·금속·운송 등 에너지 집약 산업으로 연쇄적으로 확산된다.
보고서를 작성한 빙현지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후속 분석에서 “통항·보험·운임·제재 리스크를 일시 요인이 아닌 구조적 안보 비용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비용을 기업의 계약과 보험, 무역금융 관리 체계에 상시 반영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이다.
중요한 점은 유가가 안정되더라도 모든 비용이 이전 수준으로 돌아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전쟁위험보험료와 선박 운임, 우회 항로 및 재고 확보 비용은 지정학적 긴장이 완화된 뒤에도 상당 기간 유지될 수 있다. 호르무즈 리스크는 일시적인 에너지 가격 상승을 넘어 한국 제조업 원가에 새로운 ‘지정학적 할증료’를 더하는 구조적 문제다.
헬륨 공급망은 한국 반도체의 보이지 않는 약점이다
두 번째 충격은 반도체 공정에 필요한 핵심 소재에서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이 헬륨이다. 헬륨은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 웨이퍼 냉각과 온도 제어, 누출 검사 등에 사용되며 대체재를 확보하기도 쉽지 않다.
카타르는 세계 헬륨 공급량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헬륨은 LNG 생산 과정에서 분리되는 부산물이기 때문에 카타르의 가스 생산과 수출이 차질을 빚으면 헬륨 공급도 함께 줄어든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중동 사태 이후 미국 등에서 대체 물량을 확보해 왔지만, 이는 공급망 위험을 완전히 해소했다기보다 추가 비용을 부담하며 단기적으로 완충한 것에 가깝다.
김영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3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업계 관계자들과의 간담회 이후 “핵심 소재 일부를 중동에서 조달하지 못하면 반도체 생산이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제기됐다”고 밝혔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당시 점검한 중동 의존도가 높은 반도체 관련 소재는 헬륨을 포함해 14개 품목에 이른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일정 기간 사용할 수 있는 재고를 확보했더라도 안심하기는 어렵다. 재고는 당장의 생산 차질을 늦출 수 있지만 공급망 위험 자체를 제거하지는 못한다. 장기계약이 없는 구매자는 공급 부족이 발생할 때 더 높은 현물가격과 운송비를 부담해야 하며, 이는 결국 반도체 생산원가에 반영된다.
호르무즈 리스크는 해상 물류비 상승으로도 이어진다. 전쟁위험보험료가 0.4%포인트만 상승해도 선가 1억 달러인 선박은 한 차례 운항할 때 약 40만 달러의 추가 비용을 부담할 수 있다는 것이 산업연구원의 분석이다. 항로 우회와 운송 지연, 안전재고 확대 비용까지 더해지면 수출 중심의 한국 반도체 산업은 생산과 운송 양쪽에서 비용 압박을 받게 된다.
그러나 글로벌 AI 인프라 투자는 계속 확대되고 있다. 한국의 7월 반도체 수출은 AI 인프라 투자 확대와 메모리 가격 상승에 힘입어 전년 동월보다 179% 증가했다. 이러한 성장세를 이어가려면 시장 수요뿐 아니라 전력·소재·물류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의 AI 전략은 지금까지 반도체 생산능력과 데이터센터 건설, 인재 확보와 모델 개발에 집중해 왔다. 그러나 호르무즈 사태는 AI 경쟁력이 에너지와 산업 원료의 조달 능력에 의해서도 결정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AI 반도체를 국내에서 생산하더라도 전력·헬륨·물류가 외부의 지정학적 요인에 크게 의존한다면 공급망 전체가 안전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제 한국은 석유 비축만으로 에너지 안보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LNG 장기계약과 도입선 다변화, 반도체 공정가스의 전략적 비축, 헬륨 회수·재활용 기술, 재생에너지와 원전을 포함한 안정적인 전력 확보를 하나의 AI 산업정책으로 연결해야 한다.
호르무즈 해협은 중동의 좁은 바닷길이지만, 그곳에서 형성되는 위험 프리미엄은 한국 반도체 공장의 전력비와 데이터센터 운영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AI 시대의 국가 경쟁력은 뛰어난 반도체를 설계하는 능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반도체를 흔들림 없이 생산하고 가동할 수 있는 에너지·소재·물류 인프라까지 확보해야 비로소 완성된다.
자료: 국제에너지기구, 산업연구원, 로이터, 산업통상자원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