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워싱턴은 SEP 집행을 재구성하는가 — 한국과 유럽 기업이 직면한 전략적 갈림길
왜 워싱턴은 SEP 집행을 재구성하는가 — 한국과 유럽 기업이 직면한 전략적 갈림길
  • 정연수
  • 승인 2025.12.30 12: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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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 집행을 둘러싼 논쟁은 더 이상 법률 해석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집행의 기준을 설계하느냐는 질문은, 곧 누가 기술 표준의 질서를 정의하느냐는 문제다.

 

미국 특허청(United States Patent and Trademark Office, USPTO)이 표준필수특허(SEP) 워킹그룹을 출범시킨 것은 단순한 제도 정비가 아니다. 이는 기술 표준을 둘러싼 특허 집행의 무게중심이 혁신가에게 불리하게 기울어졌다는 워싱턴의 판단이 반영된 정책적 신호다. 조용하지만 분명한 방향 전환이다.

그동안 SEP 정책은 ‘통제의 문제’로 다뤄져 왔다. 특정 기술이 산업 표준에 채택된 이후, 특허권자가 과도한 협상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것이 핵심 목표였다. 그 결과 금지명령과 배제명령은 예외적 수단으로 취급됐고, 손해배상이 사실상 유일한 구제 방식처럼 작동해 왔다.

USPTO의 최근 행보는 이 전제가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는 문제 제기다. 연방법원과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제출된 의견서들은, 집행의 약화가 표준을 가능하게 하는 혁신 유인 자체를 잠식하고 있다는 우려를 공통적으로 드러낸다. 경쟁 보호를 위해 도입된 제약이, 역설적으로 기술 공급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는 인식이다.

2025년 6월 라디안 메모리 시스템즈 유한책임회사 대 삼성전자(Radian Memory Systems LLC v. Samsung Electronics) 사건에서 USPTO가 제출한 이해관계자 의견서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의견서는 분쟁의 승패나 위법성을 판단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가처분 명령이 구조적으로 제한될 경우 특허권이 실질적 권리로 기능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특허 가치가 사전에 정확히 산정되기 어렵다는 현실에서, 손해배상만으로는 회복 불가능한 손실을 막기 어렵다는 논리다.

이러한 시각은 ITC의 DRAM 사건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Certain Dynamic Random Access Memory(DRAM) Devices 사건에서 USPTO는 배제명령을 반경쟁적 유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배타적 집행 수단이 없다면 다수의 핵심 기술은 연구실을 벗어나지 못한 채 시장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 두 사건을 관통하는 USPTO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SEP 집행은 더 이상 경쟁을 관리하는 부차적 장치가 아니라, 혁신 인프라를 유지하는 핵심 정책 도구라는 인식이다. 금지명령과 배제명령은 실패한 정책의 잔재가 아니라, 전략적으로 활용돼야 할 수단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유럽과의 차이가 선명해진다. 유럽은 협상 절차의 규제화와 구제수단의 제한을 통해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을 택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사법·행정 재량을 복원함으로써 집행력을 회복하려 한다. 집행력의 복원과 규칙의 성문화라는 두 경로가 나란히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한국 반도체·통신 기업에 미치는 영향

이 변화는 한국 반도체·통신 기업에 이중적 함의를 갖는다. 한편으로는 미국 중심 표준 생태계에서 SEP 보유 기업의 협상력이 강화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는 5G·6G, 메모리 반도체, AI 인프라 영역에서 핵심 특허를 보유한 국내 기업에게 전략적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글로벌 시장에서의 분쟁 리스크 관리가 더욱 중요해진다. 집행력이 강화된 환경에서는 특허 포트폴리오의 질과 구조, 그리고 표준 참여 전략이 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변수로 부상한다. 단순한 생산 능력이나 시장 점유율만으로는 방어가 어려운 국면이다.

특히 미국과 유럽의 SEP 집행 철학이 갈라질수록, 한국 기업은 지역별 이중 전략을 요구받게 된다. 유럽에서는 규제 기반의 협상 역량이, 미국에서는 권리 기반의 집행 대응력이 동시에 필요해진다. 이는 법무·표준·R&D 전략을 통합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는 의미다.

 APEC 2026과 SEP 집행의 지정학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2026을 향한 논의 국면에서, 표준필수특허(SEP) 집행은 역내 기술 의제의 핵심 변수로 자리 잡고 있다. 반도체, 통신, AI 인프라는 APEC 회원국 대부분이 동시에 의존하면서도 경쟁하는 전략 산업이며, 표준 채택 이후의 집행 원칙은 산업 질서의 규칙으로 직결된다.

미국이 SEP 집행 원칙을 재정의하는 움직임은 단순한 국내 법정책 조정을 넘어, APEC 기술 협력·경쟁 구도 속에서 규칙 설정을 선도하려는 전략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중국이 추진해 온 국가 주도형 표준 확장 전략과도 직접적으로 맞물린다. SEP는 이제 기술 문서의 부속 개념이 아니라, 외교·통상·산업 전략이 교차하는 핵심 정책 언어로 기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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