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순서
1부 | 법인과의 거래에서 돈을 받지 못한 경우
2부 | 상호 속용과 양수인의 책임
3부 | 회사의 이사가 부담하는 손해배상 책임
4부 | 회사라는 이름 뒤에 숨은 사람
5부 | 폭행을 당했을 경우 유의할 점
6부 | 형사합의금, 얼마가 적당한가
7부 | 술자리 이후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준강간죄가 성립할 수 있을까?
글 홍승권 | 법률사무소 판 대표변호사 (skh@law-pan.com)
술자리 다음 날, 전날의 기억이 끊기는 일은 가끔 있다. 이른바 ‘알코올 블랙아웃’이다. 찝찝한 일이지만 그것만으로 어떤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성범죄와 관련이 된다면 매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바로 준강간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형법은 상대방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한 경우를 준강간죄로 처벌한다. 그 법정형 역시 강간죄와 동일하게 매우 무겁다.
많은 경우의 준강간 사건이 술을 많이 먹어 의식을 상실하거나, 저항할 수 없게 된 경우에 발생한다.
그런데 언급했던 알코올 블랙아웃의 경우에 문제가 발생한다. 의학적으로 알코올 블랙아웃은 기억 형성 과정에 장애가 발생하는 현상으로 설명된다. 당시에는 대화를 하고, 걷고, 스스로 판단하며 행동할 수 있었음에도 그 경험이 장기 기억으로 저장되지 않는 것이다. 즉, 블랙아웃이란 그 이후 기억이 없다는 것이지, 당시에 의식이 없었다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그런데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에 당시 본인이 원치 않는 성관계를 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물론 단순히 기억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준강간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행위 당시 피해자가 정상적인 의사결정 능력이나 저항 능력을 상실한 상태에 있었음이 인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범죄 사건은 대부분 밀폐된 공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른 객관적 증거가 부족한 경우가 많고, 당사자의 진술이 중요한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당사자가 당시의 사실을 기억하지 못해서 자신이 의식이 없는 상태였고, 상대가 그 사실을 이용해 간음했다고 주장한다면 준강간죄가 성립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필자가 최근 접한 한 사건에서는, 술자리 이후 이루어진 성관계가 준강간으로 고소되었다. 고소인들은 당시 상황에 대한 자신들이 만취하여 의식이 없었다고 진술하였다. 그런데 다행히 현장에서 당사자들 사이의 대화가 녹음된 자료가 남아 있었다.
녹취 내용에 따르면, 고소인들은 성관계 과정에서 상대방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았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도 하였다. 성관계가 종료된 이후에도 함께 대화를 이어가거나 농담을 나누는 모습이 확인되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실제로 고소인들은 이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던 거 같다. 하지만 만약 이와 같은 녹취가 없었더라면 꼼짝없이 준강간죄가 성립될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에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블랙아웃 상태가 어떤 문제를 초래할 수 있는지에 대해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준강간죄는 결코 가벼운 범죄가 아니다. 유죄가 확정될 경우 징역형이 선고될 가능성이 높으며, 신상정보 등록 의무가 발생한다. 추가로 사안의 경중에 따라 신상 정보 공개나 취업 제한 등 장기간에 걸친 중대한 불이익이 뒤따를 수 있다. 성범죄 피해자를 두텁게 보호해야 한다는 점은 당연하나, 무고한 사람이 억울하게 처벌받는 일이 없어야 하는 점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특히 준강간의 경우에는 폭행이나 협박 같은 명시적인 강제성이 없이 성관계가 이루어진다는 점과, 음주가 블랙아웃의 문제를 수반할 수 있다는 특수성이 있다. 그러므로 법원과 수사기관이 이러한 특수성을 고려하여 판단하는 자세를 견지하기를 기대한다.
필자 소개
홍승권 법률사무소 판 대표변호사는 민·형사 소송을 비롯해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법적 쟁점을 다루고 있다. 그는 기술 혁신, 재산권 질서, 규제 정책의 변화가 법과 시장 질서에 미치는 영향 등을 지속적으로 분석해 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