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길을 따라 걷는 세계유산 기행
자연 속에서 우주의 이치를 탐구한 철학자
회재 이언적, 홀로 즐기며 세상의 근본을 묻다
연재 순서
이 연재는 아홉 개의 서원을 소개하는 문화유산 기행을 넘어, 한국 정신문화 700년의 흐름을 따라가는 인문학 여정이다.
제3편 | 퇴계 이황과 도산서원 — 공부는 어떻게 사람을 만드는가
제4편 | 류성룡과 병산서원 — 국가를 지킨 선비의 리더십
제5편 | 회재 이언적과 옥산서원 — 자연에서 완성한 철학
제6편 | 김굉필(金宏弼)과 도동서원 — 도학의 뿌리
제7편 | 정여창과 남계서원 — 지방에서 꽃핀 선비정신
제8편 | 김인후와 필암서원 — 청렴한 지성의 힘
제9편 | 최치원과 무성서원 — 통합의 사상
제10편 | 김장생과 돈암서원 — 예학이 만든 공동체
제11편 | 서원은 과거의 유산인가, 미래의 학교인가
글 | 정연태 건설산업정보원 원장
제5편 | 옥산서원(玉山書院)
경주라고 하면 사람들은 먼저 신라를 떠올린다. 왕릉과 불국사, 석굴암과 첨성대, 천년 왕국의 찬란한 흔적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주의 북쪽, 안강 들판을 지나 자옥산 골짜기로 들어가면 신라의 화려함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나타난다. 높은 탑도 없고, 거대한 불상도 없다. 깊은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와 오래된 나무, 산기슭에 몸을 낮춘 기와집들이 있을 뿐이다.
그곳에 옥산서원이 있다. 옥산서원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철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기리는 서원이다. 1572년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고, 이듬해인 1573년 왕으로부터 ‘옥산’이라는 이름을 받은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후 경주를 대표하는 서원에서 영남을 대표하는 학문 공간으로 성장했으며, 2019년에는 ‘한국의 서원’을 구성하는 아홉 곳 가운데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whc.unesco.org][1]) 그러나 옥산서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서원의 건물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서원 건너편 계곡에 자리한 독락당과 자옥산의 숲, 바위 사이를 흐르는 물, 그리고 그 풍경 속에서 인간과 우주의 근본을 사유했던 이언적의 마음을 함께 보아야 한다.
옥산서원은 한 철학자를 기리는 장소이면서, 인간이 자연 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낮추고 세계의 이치를 배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옥산’이라는 이름에 담긴 뜻
옥산서원의 ‘옥산’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옥과 같은 산’이라는 뜻이다. 옥은 동아시아 문화에서 단순한 보석이 아니었다. 거칠고 단단한 돌이 오랜 시간 다듬어져 맑은 빛을 내듯, 인간의 품성과 정신도 끊임없는 공부와 수양을 통해 아름답게 완성된다고 여겼다. 따라서 옥산이라는 이름에는 산의 경치가 아름답다는 의미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산처럼 흔들리지 않고, 옥처럼 맑고 단단한 인격을 기른다는 뜻도 함께 담겨 있다. 서원은 지식을 쌓아 올리는 학교이기 전에 사람을 다듬는 공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이루어진 공부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공부란 남보다 많이 아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맑게 다듬는 일이다.
배움이란 세상을 지배하는 기술을 얻는 일이 아니라 세상의 이치에 자신을 맞추는 일이다. 옥산서원은 그 조용한 뜻을 산과 물과 건물의 배치 속에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다.
회재 이언적은 누구인가
회재 이언적은 1491년 경주에서 태어나 1553년에 세상을 떠난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다. 그는 예조판서, 형조판서, 이조판서, 좌찬성 등 높은 관직을 지냈지만, 오늘날 그를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벼슬의 높이가 아니라 조선 성리학의 철학적 토대를 세운 사유의 깊이다. 그는 조선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으며, 뒤에 퇴계 이황으로 이어지는 영남학파 사상의 한 중요한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국가유산포털][2]) 이언적은 중국의 특정 스승에게 직접 사사한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경전을 읽고 현실을 성찰하며 독자적으로 자신의 철학 체계를 발전시켰다. 특히 우주와 인간을 이루는 원리인 이(理)와 현실의 구체적 작용인 기(氣)의 관계를 깊이 탐구했다.
그에게 철학은 책 속에 갇힌 관념이 아니었다.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정치인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인간의 욕심은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고난 속에서도 어떻게 바른 뜻을 지킬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그의 학문을 이루었다. 이언적은 세상의 이치를 탐구했지만, 그 시작은 늘 인간의 마음이었다. 우주의 원리를 말하면서도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고,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권력의 그릇됨에 침묵하지 않았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단순한 철학자가 아니라 삶으로 철학을 증명한 선비였다.
권력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던 선비
이언적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그는 권력자 김안로의 등용에 반대했다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다시 조정에 복귀했지만 정치적 혼란과 사화의 소용돌이를 피하지 못했고, 결국 평안도 강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국가유산포털][3]) 그의 삶을 보면 조선의 선비에게 학문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학문은 머릿속의 지식이 아니었다.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였다. 자신에게 불이익이 닥치더라도 원칙을 버리지 않는 태도였다. 이언적은 현실 정치에 참여했지만 권력에 자신의 학문을 팔지 않았다. 그는 벼슬이 선비를 높여주는 것이 아니라, 선비의 품격이 벼슬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의 삶에는 진퇴가 반복된다. 조정에 나아가 나라를 위해 일하다가도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물러났고, 다시 부름을 받으면 책임을 피하지 않았다. 세상과 단절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의 욕망에 자신을 맡기지 않는 삶이었다. 그의 호 ‘회재(晦齋)’에도 그런 정신이 담겨 있다.
‘회(晦)’는 빛을 감추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다. 진정한 학문은 자신을 과시하기보다 내면을 깊게 하는 데 있다는 의미다.
독락당, 홀로 즐기는 집
옥산서원을 말할 때 독락당을 빼놓을 수 없다. 독락당은 이언적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뒤 머물며 학문을 연구했던 공간이다. 현재 옥산서원 뒤편 계곡 건너에 자리하며, 이언적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장소다. ([국가유산포털][4]) 독락당이라는 이름은 ‘홀로 즐기는 집’이라는 뜻이다. 처음 들으면 세상을 떠나 혼자만의 즐거움을 누리는 곳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언적이 말한 ‘홀로 즐김’은 외로움이나 고립을 뜻하지 않는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학문 그 자체를 즐기는 마음이다. 벼슬과 명예가 없어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걸을 수 있는 자유다. 사람들의 칭찬이 없어도 자연과 책, 그리고 자기 마음을 벗 삼아 살아가는 기쁨이다.
독락은 세상을 버린 자의 즐거움이 아니다. 세상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의 즐거움이다. 이언적은 독락당에서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고 사색했다. 그가 바라본 자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었다.
바위는 변하지 않는 원칙을 보여주었고, 물은 막힘 없이 흘러가는 이치를 보여주었다. 나무는 계절에 따라 모습을 바꾸면서도 생명의 중심을 잃지 않았다. 자연은 인간이 만든 언어 없이도 끊임없이 이치를 말하고 있었다. 이언적에게 독락당은 서재이면서 철학 교실이었고, 자연은 가장 오래된 스승이었다.
자연은 왜 선비의 스승이 되었는가
조선의 서원들은 대부분 산과 물이 어우러진 곳에 자리한다. 이는 단순히 경치가 좋은 곳을 골랐기 때문이 아니다. 성리학자들에게 자연은 우주의 질서가 드러난 공간이었다. 산과 물, 나무와 돌, 계절의 변화에는 인간이 배워야 할 원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옥산서원과 독락당 주변의 자연은 특히 깊고 조용하다. 계곡은 건물 가까이를 흐르고, 숲은 서원을 둘러싸며, 산은 바깥세상의 소음을 막아준다. 그러나 이 공간은 세상을 완전히 차단하지 않는다. 물길은 밖으로 이어지고, 길은 마을과 연결된다.
이는 이언적의 삶과 닮았다. 그는 자연 속에 머물렀지만 세상을 잊지 않았다. 혼자 공부했지만 공동체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다. 마음을 수양했지만 현실 정치에 대한 책임을 버리지 않았다.
자연 속에서 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현실로부터 도망가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옥산서원의 공간 구조
옥산서원은 조선 서원의 전형적 공간 구성을 보여준다. 앞쪽에는 강학 공간이 있고, 뒤쪽에는 제향 공간이 자리한다. 학생들이 공부하던 강학당, 거처하던 동재와 서재, 책과 목판을 보관하던 공간, 그리고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하나의 질서 속에 배치되어 있다. 이 구조는 배움에서 수양으로, 수양에서 존경과 기억으로 이어지는 선비 교육의 과정을 보여준다.
서원에 들어오는 사람은 먼저 배우는 사람이 된다. 그다음 자신을 성찰하는 사람이 된다. 마지막에는 앞선 스승의 삶을 기억하며 자신이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묻게 된다. 건물의 배치는 곧 교육의 순서였다.
옥산서원은 화려한 장식을 앞세우지 않는다. 목재와 흙, 돌과 기와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건물이 자연을 압도하지 않고, 자연 속에 자신을 낮춘다. 이는 인간도 우주의 중심을 자처해서는 안 된다는 성리학적 세계관과 닿아 있다.
사람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구인당과 ‘어진 마음’을 구하는 공부
옥산서원의 중심 강당은 구인당(求仁堂)이다. ‘구인’은 어진 마음, 곧 인(仁)을 구한다는 뜻이다. 유교에서 인은 인간다움의 핵심이다. 타인을 사랑하고, 자신을 절제하며, 공동체를 함께 살아가는 마음이다.
따라서 구인당은 단순히 글을 읽고 강의를 듣는 교실이 아니었다. 인간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하는 공간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공부를 능력의 확장으로 생각한다. 더 빨리 계산하고, 더 많이 기억하고, 더 높은 성과를 내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 되기 쉽다.
그러나 구인당이 말하는 공부는 다르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는가. 지위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 낮출 수 있는가. 힘이 커질수록 약한 사람을 더 살필 수 있는가.
지식이 인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공부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옥산서원의 교육철학은 구인당이라는 세 글자에 압축되어 있다. 공부의 끝은 지식이 아니라 사람다움이다.
이언적의 철학, 이(理)를 밝히다
이언적의 학문에서 중요한 개념은 이(理)다. 이는 세상 만물에 깃든 보편적 원리와 질서를 뜻한다. 해가 뜨고 지며 계절이 순환하는 데에도 이치가 있다. 인간이 부모를 사랑하고, 타인을 존중하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에도 이치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욕심과 감정 때문에 그 이치를 잊기 쉽다. 이언적은 학문과 수양을 통해 마음속의 바른 원리를 드러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철학은 인간을 세상과 분리된 존재로 보지 않았다. 인간의 마음과 우주의 질서는 서로 이어져 있다.
마음이 바르면 행동이 바르게 되고, 행동이 바르면 가정과 사회, 정치도 바르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뒤에 퇴계 이황의 철학으로 이어져 조선 성리학의 중요한 흐름을 이루었다. 국가유산청의 해제 자료 역시 이언적의 주리론적 사상이 퇴계로 계승되어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국가유산포털][2]) 이언적이 자연 속에서 우주의 원리를 탐구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마음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었다.
맑은 물을 바라보며 마음의 맑음을 생각하고, 변하지 않는 산을 보며 도덕적 원칙을 생각했다. 자연을 보는 일은 곧 자신을 보는 일이었다.
유배지에서도 멈추지 않은 공부
이언적의 삶에서 가장 깊은 울림을 주는 장면은 유배 생활이다. 그는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도 강계로 유배되었다. 고향과 가족, 제자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절망 속에서도 공부를 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곳에서 임금이 지켜야 할 수양과 정치의 원칙을 정리한 저술을 남겼다. 그의 『진수팔규』는 군주가 덕을 닦기 위해 지켜야 할 여덟 가지 항목을 담은 글로, 유배 중이던 1550년에 저술된 것으로 설명된다. ([국가유산포털][2]) 자신을 유배 보낸 정치권력에 원망만 품었다면 이런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개인의 억울함보다 나라의 미래를 더 크게 보았다. 자신이 고통받는 순간에도 임금과 정치가 바른 길로 가기를 바랐다.
여기서 선비의 공부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공부는 좋은 환경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순간에도 자신을 잃지 않는 힘이다. 고난을 원망으로 바꾸지 않고 성찰로 바꾸는 능력이다.
이언적은 유배지에서도 세상과 단절되지 않았다. 그의 육신은 변방에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나라와 백성을 향하고 있었다.
옥산서원이 지켜온 기록의 힘
옥산서원은 건축물뿐 아니라 많은 기록유산을 보존해 왔다. 특히 이언적의 친필 원고를 포함한 수고본들은 조선 시대 경학과 정치사상, 예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언적의 수고본은 여러 책으로 구성되어 옥산서원과 독락당에 전해져 왔으며, 국가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5]) 서원이 중요한 까닭은 사람을 가르쳤기 때문만이 아니다. 사상과 기억을 보존했기 때문이다.
한 시대의 학문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글과 책, 목판과 문서가 남으면 그 생각은 다음 세대와 다시 만난다. 옥산서원은 이언적의 정신을 제향으로만 기리지 않았다. 그의 글을 보존하고 읽으며 학문으로 이어갔다.
기억을 의례 속에만 가두지 않고 지식으로 전승한 것이다. 이것이 서원이 사당과 다른 점이다. 서원은 존경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스승의 생각을 읽고, 질문하고, 다시 해석하며 살아 있게 한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에서도 살아남다
조선 후기 서원이 지나치게 늘어나면서 여러 폐단이 생겼다. 일부 서원은 학문보다 당파와 지역 권력의 중심이 되었고, 면세와 특권을 누리며 백성에게 부담을 주기도 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전국의 서원을 대폭 철폐했다. 수많은 서원이 사라졌지만 옥산서원은 존속한 서원 가운데 하나였다. 오랜 학문 전통과 역사적 권위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6])
이 사실은 옥산서원이 단순한 지방 서원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옥산서원은 이언적 개인을 추모하는 데 머물지 않고, 영남 성리학의 중요한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서원이 정치적 특권의 공간으로 변질될 때에도 옥산서원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곳에 축적된 학문과 기록, 교육 전통의 무게가 컸기 때문이다. 문화유산은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살아남지 않는다.
후대가 그 가치를 계속 인정하고 지켜야 살아남는다. 옥산서원의 역사는 한 공간을 보존하는 일이 곧 사상과 기억을 보존하는 일임을 보여준다.
왜 유네스코는 옥산서원을 인정했는가
유네스코가 2019년 ‘한국의 서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한 이유는 아홉 서원이 조선 시대 성리학 교육기관의 독특한 전통을 함께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네스코는 한국의 서원에서 학문, 선현에 대한 제향, 자연환경과의 교류라는 세 가지 핵심 기능이 건축과 공간 구성에 드러난다고 평가했다. ([whc.unesco.org][1]) 옥산서원은 이 세 요소를 매우 잘 보여준다. 첫째는 학문이다.
이언적의 사상을 배우고 후학을 길러낸 교육 공간이다. 둘째는 제향이다. 스승의 삶과 덕을 기억하며 그의 정신을 계승하는 공간이다. 셋째는 자연과의 관계다.
자옥산과 계곡, 독락당과 서원이 하나의 정신적 풍경을 이룬다. 특히 옥산서원은 건물 하나의 아름다움보다 주변 경관과의 조화가 중요하다. 서원은 산과 물을 배경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그 자연환경과 함께 하나의 교육 공간을 구성한다. 자연을 바라보는 일도 공부였고, 물소리를 듣는 일도 마음을 다스리는 과정이었다.
유네스코가 인정한 것은 기와집의 형태만이 아니다. 인간과 자연, 학문과 삶, 기억과 교육이 하나로 이어진 문화적 전통이었다.
‘홀로 즐김’과 공동체적 책임
독락당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언적의 학문을 개인적 은둔의 철학으로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삶을 보면 독락은 결코 개인주의가 아니었다. 그는 혼자 있을 때 자신의 마음을 닦았고, 세상에 나아가서는 그 마음을 정치와 공동체를 위해 사용했다. 혼자 공부하는 까닭은 세상을 외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세상의 소음에 휘둘리지 않고 더 바르게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우리는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다. 휴대전화와 인터넷, 소셜 미디어를 통해 수많은 사람과 정보를 만난다. 그러나 연결이 많아질수록 자기 마음과 홀로 마주하는 시간은 줄어들고 있다.
독락당은 우리에게 말한다. 혼자 있는 시간은 고립이 아니다. 자신의 생각이 정말 자신의 것인지 확인하는 시간이다. 사람들의 평가와 유행을 벗어나 무엇이 옳은지 묻는 시간이다.
그러나 그 홀로 있음은 다시 공동체로 돌아갈 때 완성된다. 자신을 깊이 들여다본 사람만이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을 살핀 사람만이 권력을 책임 있게 사용할 수 있다. 독락은 개인의 자유이면서 공동체적 책임의 시작이다.
오늘의 교육과 옥산서원
오늘의 학교는 지식을 빠르게 전달한다. 학생들은 수많은 과목을 배우고 시험을 치른다. 그러나 옥산서원에 서면 교육의 목적을 다시 묻게 된다. 공부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한 것인가. 더 많은 재산과 권력을 얻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마음을 다스리고 세상을 바르게 바라보기 위한 것인가. 이언적의 학문은 인간의 내면과 현실의 정치를 분리하지 않았다.
마음이 흐린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정치도 흐려진다. 욕심을 다스리지 못한 사람이 지식을 가지면 그 지식은 타인을 해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따라서 교육은 능력만 키워서는 안 된다. 그 능력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인격을 함께 길러야 한다.
구인당의 이름이 오늘날에도 중요한 이유다. 교육은 유능한 사람을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어진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AI 시대에 다시 읽는 회재 이언적
인공지능은 인간이 수백 년 동안 축적한 지식을 빠르게 분석하고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낸다. 앞으로 사람은 기계보다 더 많이 기억하거나 더 빠르게 계산하는 능력만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이언적이 추구한 공부는 애초에 정보의 양을 겨루는 일이 아니었다. 그의 공부는 이치를 분별하는 힘이었다.
무엇이 가능한가를 아는 것과 무엇이 옳은가를 판단하는 것은 다르다. AI는 가능한 선택을 수천 개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어떤 선택이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를 지키는지는 인간이 판단해야 한다. AI는 인간의 욕망을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욕망을 절제해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실천하지는 않는다. AI는 윤리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윤리적 책임을 지고 고통을 감수하는 존재는 인간이다. 회재 이언적의 철학은 AI 시대에 오래된 사상이 아니라 새로운 기준이 된다.
기술이 강해질수록 인간의 마음은 더 깊어야 한다. 능력이 커질수록 원칙은 더 분명해야 한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무엇이 근본인지 묻는 철학이 더 필요하다. 옥산서원은 우리에게 지식의 미래보다 인간의 중심을 먼저 묻는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다
현대인은 자연을 자원으로 바라보는 데 익숙하다. 산은 개발할 땅이 되고, 강은 이용할 물이 되며, 숲은 경제적 가치로 평가된다. 그러나 옥산서원의 공간은 다른 관계를 보여준다. 자연은 소유하고 지배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다.
산의 침묵 앞에서 말의 가벼움을 돌아보고, 물의 흐름 앞에서 욕심의 막힘을 생각하며, 오래된 나무 앞에서 인간 생명의 짧음을 깨닫는다. 이런 자연관은 오늘날 생태 위기의 시대에 더욱 절실하다.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면 인간은 결국 자신의 삶의 터전을 파괴한다. 이언적이 보았던 우주의 이치는 인간만을 위한 질서가 아니었다.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각자의 자리를 지킬 때 조화를 이룬다. 옥산서원은 과거의 철학 공간이면서 미래의 생태 교육 공간이 될 수 있다.
자연을 보존해야 하는 이유를 법과 경제만으로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자연을 존중하는 태도가 살아나야 한다.
옥산서원을 떠나며
옥산서원을 나설 때 가장 오래 남는 것은 건물의 규모가 아니다. 계곡물 소리다. 그 물은 이언적이 살았던 시대에도 흘렀을 것이다. 그가 정치적 좌절을 겪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흘렀고, 독락당에서 책을 읽을 때에도 흘렀으며, 후학들이 서원을 세웠을 때에도 흘렀다.
사람은 떠나고 시대는 바뀌지만 물은 흐른다. 그러나 흐른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잊는다는 뜻이 아니다. 물은 지나가면서도 길을 남긴다. 이언적의 삶도 그러하다.
그는 권력의 중심에 있었지만 권력에 자신을 맡기지 않았다. 고향으로 물러났지만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유배지에 갇혔지만 생각까지 갇히지는 않았다. 자연 속에서 홀로 즐겼지만 그 공부의 끝은 나라와 백성을 향했다.
옥산서원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혼자 있을 때 무엇을 생각하는가. 내가 배우는 지식은 내 마음을 더 맑게 하는가. 나는 세상의 흐름을 따르기만 하는가, 아니면 그 흐름 속에서 지켜야 할 원칙을 가지고 있는가.
자연 속에서 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특별한 깨달음을 얻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마음속의 소음을 조금 내려놓고,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던 산과 물 앞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다시 묻는 일이다. 옥산서원에는 회재 이언적의 글과 정신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잠시 멈추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고요도 남아 있다.
그 고요 속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세상의 근본을 알려면 먼저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깊이 공부한 사람만이 세상을 바르게 섬길 수 있다.
다음 편 예고
제6편 | 도동서원(道東書院)
사림정신의 뿌리, 김굉필과 도학의 길
옥산서원이 자연 속에서 우주의 이치와 인간의 마음을 탐구한 철학자의 공간이라면, 도동서원은 학문을 삶으로 지키기 위해 죽음까지 감수한 선비의 공간이다. 다음 여정에서는 대구 달성의 낙동강변으로 떠나 한훤당 김굉필의 삶을 만난다. 조광조의 스승이자 조선 사림정신의 뿌리가 된 김굉필은 왜 『소학』을 평생의 공부로 삼았을까.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거센 정치적 폭풍 속에서도 그가 끝까지 지키려 했던 도학의 길은 무엇이었을까.
도동서원에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될 것이다. 배운 것을 목숨보다 귀하게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필자 소개
정연태(필명: 만리풍취)는 문화사상가이자 정책전략가다. 역사와 철학, 과학기술을 연결하는 융합적 관점에서 한국의 전통문화를 현대 문명과 AI 시대의 미래 가치로 재해석하는 연구와 집필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