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스테이블코인 경쟁이 법안 논의를 넘어 인프라 구축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미국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 USDC 발행사 서클(Circle Internet Group)이 카카오그룹과 토스·토스뱅크를 잇달아 전략적 파트너로 선택한 것은 단순한 업무협약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서클은 카카오·카카오페이·카카오뱅크와 블록체인 기반 결제 인프라 및 디지털 자산 기술 협력을 추진하기로 했으며, 토스와 토스뱅크와도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한 결제·정산, 해외송금, 디지털 지갑, 토큰화 금융 서비스 가능성을 공동 검토하기로 했다.
이번 협력의 핵심은 한국 시장에서 특정 금융회사나 블록체인 사업자 하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플랫폼과 은행, 결제망을 동시에 연결하는 구조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이는 스테이블코인의 경쟁이 더 이상 '누가 코인을 발행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금융 인프라를 연결하느냐'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후발주자인 한국, 규제보다 늦으면 안 되는 것은 인프라
단테 디스파르테(Dante Disparte) 서클 최고전략책임자는 한국이 미국과 유럽의 규제 경험을 활용할 수 있는 '세컨드 무버'의 장점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의 스테이블코인 정책과 유럽연합 MiCA를 참고해 보다 정교한 제도를 설계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규제를 늦게 만드는 것과 기술 준비까지 늦추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결제망, 디지털 지갑, 자금세탁방지 체계, 블록체인 연결 기술, 개발자 생태계는 단기간에 구축하기 어렵다. 법안 통과 이후에야 기술 개발을 시작한다면 국내 기업은 글로벌 사업자가 만든 인프라에 의존할 가능성이 커진다.
서클이 국내 규제가 마련되기 전부터 카카오와 토스 등과 기술 협력을 시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진짜 경쟁은 '원화 코인'이 아니라 연결 능력
카카오와 토스는 메신저와 결제, 인터넷은행, 금융서비스를 연결하는 생활 금융 플랫폼이다. 서클이 이들을 선택한 이유 역시 스테이블코인의 가치는 발행 자체보다 얼마나 많은 사용자를 금융망으로 연결하느냐에 있기 때문이다.
스테이블코인이 금융 인프라가 되기 위해서는 디지털 지갑과 결제 시스템, 은행, 해외송금, 블록체인 네트워크가 하나의 구조로 연결돼야 한다. 결국 경쟁력은 특정 코인의 시장점유율보다 서로 다른 통화와 금융망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한국이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도입하더라도 국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면 글로벌 경쟁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원화와 달러 스테이블코인, 국내 은행과 해외 금융기관, 다양한 블록체인이 상호운용될 때 비로소 해외송금과 무역결제, 콘텐츠 수출, 글로벌 플랫폼 정산에서도 경쟁력이 생긴다.
AI 시대, 스테이블코인은 기계의 결제 인프라
이번 협력은 AI 산업과도 맞닿아 있다. 생성형 AI가 AI 에이전트 시대로 진화하면서 앞으로는 사람이 아니라 AI가 데이터를 구매하고 클라우드 자원을 결제하며 서비스를 자동 이용하는 환경이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기존 카드와 은행계좌는 사람 중심으로 설계돼 있지만 스테이블코인은 스마트계약을 통해 초소액·고빈도 거래를 자동화할 수 있다. 서클 역시 AI 에이전트가 USDC를 활용해 자율적으로 결제를 수행하는 구조와 나노페이먼트 기술을 공개하며 AI 금융 인프라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앞으로 디지털 지갑이 단순한 송금 수단을 넘어 AI가 거래를 수행하는 금융 인터페이스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규제의 목적은 시장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연결하는 것
스테이블코인 확산은 준비자산 관리, 환매, 자금세탁방지, 보안, 개인정보 보호 등 새로운 규제 과제를 동반한다. 그러나 규제의 목적은 시장을 늦추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금융 주체가 안전하게 연결될 수 있는 공통 규칙을 만드는 데 있다.
발행자는 준비자산을 관리하고, 은행은 법정화폐와 연결하며, 핀테크는 결제와 지갑을 제공하고, 기술기업은 블록체인 인프라를 구축하는 역할 분담이 함께 설계될 필요가 있다.
서클과 카카오·토스의 협력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즉각적인 출범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글로벌 금융 인프라 기업과 국내 대표 플랫폼이 규제 시행 이후를 대비해 기술 연결을 먼저 시작했다는 신호에 가깝다.
앞으로의 경쟁은 누가 가장 먼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느냐가 아니다. 원화와 달러, 은행과 핀테크, 블록체인과 기존 금융망, 그리고 인간과 AI 에이전트를 하나의 신뢰 가능한 시스템으로 연결하는 국가가 디지털 금융의 주도권을 갖게 된다.
한국의 과제 역시 새로운 코인 하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AI 시대를 뒷받침할 디지털 금융 운영체제를 구축하는 데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