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디지털 규제가 이제는 단순한 제도적 장치가 아니라 스타트업 생태계의 성장과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규제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규제를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혁신과 투자, 일자리 창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옥스퍼드 이코노믹스(Oxford Economics)가 디지털 프로스퍼리티 아시아(Digital Prosperity Asia·DPA)의 의뢰를 받아 5일 발표한 이번 연구는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 관계자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와 경제모형 분석을 바탕으로 작성됐다. 보고서는 디지털 규제가 신뢰와 보안, 시장 안정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규제의 설계 방식에 따라 혁신의 속도와 투자 환경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조사 결과 국내 스타트업의 86%는 디지털 규제가 사업 운영에 제약을 주고 있다고 답했다. 또 77%는 규제로 인해 혁신 활동이 영향을 받고 있다고 응답했으며, 전체의 76%는 운영비의 5% 이상을 규제 준수에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 10곳 가운데 8곳은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내부 조직과 업무 프로세스를 재편한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이러한 비용이 단순한 행정 부담을 넘어 연구개발(R&D) 투자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응답 기업의 58%는 연구개발에 투입해야 할 자금이 규제 대응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답했으며, 상당수 기업은 제품 출시 일정이 지연되거나 시장 진입 속도가 늦어지고 있다고 응답했다. 특히 설립 초기의 소규모 스타트업일수록 이러한 부담이 더욱 크게 나타났다.
투자시장에서도 규제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스타트업의 절반은 현재의 규제가 투자 유치 과정에서 불확실성을 높인다고 응답했으며, 벤처캐피털(VC)의 58% 역시 규제가 투자 수익률 예측을 어렵게 만든다고 답했다. 연구는 규제가 더욱 강화될 경우 투자 확대를 기대하는 기업의 비율도 크게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옥스퍼드 이코노믹스는 보다 유연하고 혁신 친화적인 규제체계가 구축될 경우 2026년부터 2035년까지 스타트업 설립이 약 15% 증가하고, 연간 벤처투자는 약 2조4천억 원 늘어날 수 있다고 추정했다. 또한 매년 약 240개의 신규 스타트업이 추가로 탄생하고, 2035년에는 약 2만1천 개의 일자리가 더 창출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반대로 규제가 더욱 경직될 경우 스타트업 설립과 투자, 고용 모두 감소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결과는 AI와 디지털 플랫폼이 산업 전반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에 세계 각국이 공통적으로 고민하는 과제와도 맞닿아 있다. 미국과 유럽, 아시아 주요 국가들은 개인정보 보호와 AI 안전성, 플랫폼 책임을 강화하는 동시에 혁신을 저해하지 않는 규제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정책적 균형점을 찾고 있다.
한국 역시 앞으로의 논의는 '규제를 강화할 것인가, 완화할 것인가'라는 이분법을 넘어 신뢰를 확보하면서도 혁신의 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규제 설계에 초점이 맞춰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AI가 국가 경쟁력의 핵심 인프라가 되는 시대에는 자본과 기술뿐 아니라 규제의 품질 자체가 국가 경쟁력을 결정하는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연구는 디지털 프로스퍼리티 아시아(DPA)의 의뢰로 수행된 만큼 연구 결과는 다양한 정책적 시각과 함께 종합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이번 보고서는 디지털 규제가 단순한 행정 절차를 넘어 혁신과 투자, 국가 경쟁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수치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정책 논의에 의미 있는 참고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AI가 국가 경쟁력의 핵심 인프라가 되는 시대에는 자본과 기술뿐 아니라 규제의 품질 자체가 국가 경쟁력을 결정하는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