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AI 기업의 첨단 모델을 중국 기업들이 대규모로 증류했다는 의혹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미국의 추가 제재보다 먼저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인 곳은 중국이다. 중국 인터넷 규제당국이 딥시크(DeepSeek)와 문샷AI(Moonshot AI)를 상대로 이용자 데이터가 미국 앤트로픽(Anthropic)의 클로드(Claude)로 전달됐는지를 조사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조사는 모델 증류 논쟁의 성격을 바꾼다. 미국에서는 중국 기업이 미국 첨단 모델의 추론 능력을 얼마나 가져갔는지가 핵심 쟁점이었다. 중국에서는 자국 기업과 공공기관, 이용자의 민감한 데이터가 미국 AI 모델로 넘어갔는지가 새로운 문제로 떠올랐다. 하나의 API(응용 프로그램 인터페이스)를 사이에 두고 미국의 기술보호와 중국의 데이터 주권이 동시에 걸린 양방향 규제 문제가 형성되고 있다.
앤트로픽은 지난 10일 공개한 조사보고서에서 중국 기업들이 프록시 서비스와 대규모 계정 네트워크를 이용해 클로드의 추론 결과를 수집했다고 주장했다. 알리바바 관련 활동의 경우 5월부터 7월까지 1억5100만 건 이상의 교환을 관찰했으며, 문샷AI는 같은 기간 2300만 건 이상, 딥시크는 7월 14일 동안 1210만 건 이상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Z.AI 브랜드를 운영하는 즈푸(Zhipu)에 대해서도 6~7월 17일 동안 340만 건 이상의 교환을 관찰했다고 주장했다. 이 수치와 기업별 활동에 대한 판단은 앤트로픽 자체 조사 결과이며 해당 기업들이 인정했거나 독립적으로 검증된 사실은 아니다.
모델 증류에서 데이터 주권으로 쟁점 확대
가장 중요한 변화는 증류에 사용됐다고 주장되는 데이터의 출처다. 앤트로픽에 따르면 문샷AI는 일부 이용자가 Kimi를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요청을 클로드로 전달했다. 앤트로픽은 문샷AI가 5,380개 계정으로 구성된 프록시 네트워크를 이용했으며, 전달된 내용 가운데 중국 국유기업 내부 코드와 자격증명, 중국 인민해방군 관련 감시 업무로 추정되는 정보가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딥시크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제기됐다. 앤트로픽은 중국 기술기업의 내부 AI 프로그램 자료와 중국 지방 공안기관을 위한 사건관리 시스템 개발 요청 등이 딥시크를 거쳐 클로드로 전달된 사례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러시아 국방 관련 정부기관 데이터베이스의 실제 접속정보가 포함된 요청도 있었다고 주장했다.
앤트로픽은 보고서에서 “딥시크, 샤오미, 문샷은 자사 모델과 이용자 사이의 대화를 클로드에 입력했다(DeepSeek, Xiaomi, and Moonshot fed conversations between their own models and users into Claude)”고 밝혔다. 단순히 인위적으로 만든 질문을 미국 모델에 반복 입력해 학습 데이터를 확보했다는 의혹에서 더 나아가 실제 이용자의 대화가 증류 과정에 사용됐다는 주장이다.
이 부분은 중국 규제당국이 움직인 배경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중국 국가인터넷정보판공실(CAC)은 앤트로픽 보고서에 이름이 등장한 기업들을 불러 설명을 요구한 뒤 딥시크와 문샷AI의 데이터 이동 문제를 조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됐다. 아직 중국 당국이 위법 여부를 판단하거나 제재를 결정한 단계는 아니다.
모델 증류 자체는 AI 개발에서 널리 사용하는 기술이다. 작은 모델이 더 큰 모델의 출력에서 학습하는 방식 자체가 곧 불법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번 사건에서 확인해야 할 핵심은 접근 제한을 우회하기 위해 허위 계정과 프록시, 제3자 서비스를 사용했는지, 클로드의 비공개 추론정보를 의도적으로 추출했는지, 그 과정에서 이용자에게 알리지 않은 채 데이터를 국경 밖으로 전달했는지다.
앤트로픽은 중국 기업들의 방식이 점점 정교해지고 있다며 “허가받지 않은 연구조직들이 우리의 방어체계를 우회하기 위해 갈수록 정교한 방법을 개발해왔다(unauthorized labs have developed increasingly sophisticated methods to circumvent our defenses)”고 밝혔다. 회사는 이에 대응해 내부 추론 내용을 요약해 제공하고, 새로운 API 계정이 추론 이전의 시스템 프롬프트나 도구 등을 변경하기 어렵게 하는 추가 방어장치를 적용했다고 설명했다.
API가 새로운 미·중 AI 국경이 된다
이번 사건의 더 큰 의미는 AI 경쟁에서 통제해야 할 대상이 반도체에서 모델 접근과 데이터 흐름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대중국 AI 통제는 지금까지 엔비디아의 첨단 GPU와 반도체 제조장비 같은 물리적 인프라에 집중됐다. 그러나 첨단 모델의 능력은 반드시 GPU와 함께 국경을 넘는 것은 아니다. API를 통해 대규모 질의와 응답을 확보하고 이를 후속 모델 학습에 이용할 수 있다면 모델의 능력 자체가 국경을 넘어 이전될 수 있다.
반대 방향의 위험도 존재한다. 중국 이용자가 자국 AI 서비스를 이용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요청이 미국 모델로 전달됐다면 API는 미국 모델의 능력을 중국 기업이 활용하는 통로인 동시에 중국 데이터를 미국의 AI 시스템으로 보내는 통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사건에서 중요한 질문은 누가 누구의 모델을 모방했는가에 그치지 않는다. 앞으로 각국 정부가 모델 접근권과 API 호출, 프록시 서비스, 이용자 데이터의 국경 간 이동을 하나의 AI 공급망으로 보고 규제할 것인지가 더 중요한 정책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 변화는 미·중 정부 간 AI 대화와도 맞물린다.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과 허리펑 중국 부총리는 20일 뉴욕에서 AI 문제를 논의했고, 미국 측은 국가안보 수준의 AI 사고가 발생할 경우 양국이 서로 알리는 통보 체계를 제안했다. 베선트는 세계 1·2위 AI 강국 사이에서 “불투명한 상태에서 더 높은 투명성으로 나아가는 것(moving from opaque to more transparency)”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중국 측은 AI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했지만 미국의 제안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은 공개하지 않았다.
미 무역대표부(USTR)의 제이미슨 그리어 대표는 이번 AI 논의에서 첨단 AI 반도체와 반도체 제조장비에 대한 미국의 수출통제는 의제가 아니었다고 밝혔다. 이는 현재 양국의 AI 대화가 수출통제 협상과 별개의 안전·국가안보 채널로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델 증류 문제가 정상급 협상의 공식 의제로 채택됐다는 증거도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두 흐름이 계속 분리돼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한쪽에서는 양국이 AI 사고와 국가안보 위험을 공유할 대화 채널을 만들려 하고, 다른 쪽에서는 미국과 중국 AI 기업 사이에서 모델 접근과 데이터 이동을 둘러싼 갈등이 커지고 있다. 모델 증류 문제가 민감한 정부·기업 데이터의 국경 간 이동과 결합하면 기업 간 서비스 약관 분쟁을 넘어 국가안보와 데이터 규제의 영역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커진다.
현재 미국이 딥시크, 문샷AI, 알리바바, 미니맥스(MiniMax), 스텝펀(StepFun), Z.AI 등을 이번 증류 의혹 때문에 새로 미 상무부 거래제한 명단(Entity List)에 올리거나 미 재무부 금융제재를 부과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들을 겨냥한 새로운 정부 차원의 API·클라우드 접근금지 조치도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다음 신호는 세 가지다. 중국이 딥시크와 문샷AI 조사 결과를 데이터 국외이전 규제나 AI 서비스 규정 강화로 연결하는지, 미국이 모델 API와 프록시 접근을 수출통제 또는 별도의 기술보호 체계에 포함시키는지, 미·중 AI 대화와 정상급 협상에서 모델 접근과 증류가 공식 의제로 등장하는지다.
첫 번째 AI 국경이 GPU였다면 이제 모델과 API, 그리고 그 안을 통과하는 데이터가 새로운 경계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은 자국 첨단 모델의 능력이 중국 기업으로 이전되는 것을 우려하고, 중국은 자국의 민감한 데이터가 미국 AI 시스템으로 넘어갈 가능성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두 문제가 동시에 규제 대상이 된다면 미·중 AI 경쟁의 질문도 달라진다. 누가 더 많은 GPU를 확보하는지를 넘어 누가 어떤 모델에 접근할 수 있는가, 그 모델을 통해 어떤 데이터가 어느 국가로 이동하는가가 새로운 통제 기준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이번 사건이 보내는 두 번째 신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