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순서
1부 | 법인과의 거래에서 돈을 받지 못한 경우
2부 | 상호 속용과 양수인의 책임
3부 | 회사의 이사가 부담하는 손해배상 책임
4부 | 회사라는 이름 뒤에 숨은 사람
글 홍승권 | 법률사무소 판 대표변호사 (skh@law-pan.com)
생각보다 회사를 차리는 데 큰돈이 들지 않는다. 자본금 100만 원으로도 주식회사를 세울 수 있고, 인터넷으로 며칠이면 등기까지 마칠 수 있다. 회사라는 제도가 그만큼 손쉽게 이용되고 있다는 뜻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회사가 본래의 취지와 달리 누군가의 책임을 가려 주는 가림막으로 쓰이는 일도 적지 않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다. A는 어떤 회사와 큰 금액의 계약을 맺었는데, 막상 대금을 받을 시점에 회사에는 한 푼의 재산도 남아 있지 않다. 그 회사를 들여다보니 사무실은 다른 회사의 사무실을 함께 사용하고 있었으며, 직원이라고는 사장 한 사람뿐이었으며, 법인 통장은 사실상 사장의 개인 통장처럼 운용되어 왔다.
또는 빚이 잔뜩 쌓인 회사가 어느 날 갑자기 문을 닫고, 며칠 뒤 거의 같은 사업이 새 회사 이름으로 다시 시작된다. 직원도 거래처도 거의 그대로고, 사장도 같은 사람이거나 그의 가족이다. 다만 회사 이름과 사무실, 등기만 바뀌었을 뿐이다.
회사는 법인격이 있어 그 자체로 다른 회사 혹은 개인과 완전히 분리된다. 그러나 그것이 악용되었을 때까지 법이 그것을 보호해 줄 수는 없다. 그래서 나온 것이 법인격부인이라는 개념이다.
법인격부인이란, 회사가 형식상으로는 별개의 법인격을 갖추고 있더라도 실제는 그에 부합하지 않거나 그 법인격이 본래의 목적과 달리 남용된 경우에 한하여, 예외적으로 회사라는 외형을 무시하고 그 뒤에 있는 사람이나 다른 회사에 직접 책임을 묻는 법리를 말한다. 회사 제도의 근본을 흔드는 셈이므로 매우 까다로운 요건 아래에서만 인정된다.
그 요건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회사의 법인격이 사실상 형해화된 경우이다. 회사라는 이름만 있을 뿐 실체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회사의 재산과 사장 개인 재산이 뒤섞여 있고, 회사의 의사결정이 회사 뒤에 있는 누군가의 뜻으로 좌우되며, 주주총회나 이사회 같은 형식적 절차가 거의 지켜지지 않고, 회사의 자본이 통상 그 영업을 수행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면, 그 회사는 실질에 있어 그 누군가의 개인 기업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경우에는 회사에 대한 책임을 회사 뒤에 있는 자에게 부담하게 할 수 있게 된다.
다른 하나는 회사의 법인격이 형해화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법인격이 채무를 면탈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용된 경우이다. 회사가 회사 뒤에 있는 누군가의 채무 면탈이라는 위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설립된 것으로 평가될 만한 사정이 있다면, 채권자는 그 누군가를 상대로도 채무의 이행을 청구할 수 있다.
다만 법인격부인이 실제로 인정되는 사례는 흔하지 않다. 회사가 개인과는 다른 별개의 인격을 가진다고 보는 것이 회사법의 기본 원칙이므로, 단순히 회사에 돈이 없다거나 사장이 회사를 사실상 좌우한다는 사정만으로는 법인격이 부인되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요건을 충족하는지가 중요한데, 사안에 따라 매우 다르므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면밀하게 살펴봐야 한다.
지금까지 세 차례에 걸쳐 회사가 빚을 갚지 않을 때 채권자가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상호를 그대로 이어 쓴 회사에 책임을 묻는 것, 회사 뒤에서 실질적으로 일을 처리한 이사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방법,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사라는 법인격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어느 하나도 손쉽게 인정되는 것은 없지만, 법인과 거래하여 대금을 받기 막막한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고려해 볼 만하다.
필자 소개
홍승권은 법률사무소 판의 대표변호사다. 민·형사 소송을 포함해 디지털 시대에 부상하는 새로운 법적 과제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그는 기술 혁신, 재산권 질서, 규제 정책의 변화가 법과 시장 구조에 미치는 영향을 지속적으로 분석해 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