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주행차 경쟁의 무게중심이 센서와 개별 주행 기능에서 ‘데이터를 얼마나 빠르게 학습시키느냐’로 이동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도 전 세계에서 판매되는 차량과 실제 도로에서 축적되는 데이터를 AI 학습으로 연결하는 체계를 본격 가동하며 자율주행 기술 개발 속도를 끌어올리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11일 경기 성남시 포티투닷 본사에서 ‘현대차그룹 자율주행 미디어 데이’를 열고 자율주행 개발 전략과 자체 자율주행 AI ‘Atria AI(아트리아 AI)’의 개발 현황을 공개했다.
이날 가장 눈길을 끈 것은 Atria AI를 탑재한 SDV 테스트베드 차량의 실제 도심 주행이었다. 현대차그룹은 차량이 운전자 개입 없이 서울의 복잡한 도로 환경을 주행하는 영상을 처음 공개했다. 현재 기술 수준은 ‘레벨 2++’로 설명했다.
영상에는 갓길 주정차 차량을 피해 가거나 갑자기 끼어드는 차량에 대응하고, 비보호 좌회전과 혼잡 구간의 보행자, 이면도로에서 마주 오는 차량 등을 인식해 주행하는 장면이 담겼다.
단순한 시험장 시연이 아니라 강남과 잠실, 판교 등 실제 도로에서 출근시간 혼잡과 대형 차량, 우천 등 서로 다른 조건을 시험했다는 점에 의미를 뒀다.
엔비디아로 양산 속도, Atria AI로 기술 내재화
현대차그룹의 자율주행 전략은 외부 기술과 자체 기술을 동시에 가져가는 ‘투트랙’ 방식이다.
첫 번째 축은 엔비디아다. 현대차그룹은 엔비디아의 차량용 AI 컴퓨팅 플랫폼과 자율주행 소프트웨어를 SDV 차량 아키텍처에 적용해 2028년 상반기 엔비디아 솔루션 기반 레벨 2+ 기능을 양산차에 탑재할 계획이다. 같은 해 하반기에는 레벨 2++ 적용 차량 출시를 목표로 잡았다.
현대차·기아 AVP본부와 포티투닷, 모셔널 등이 각각 활용해온 센서 체계도 엔비디아 ‘DRIVE Hyperion 10’을 중심으로 단계적으로 표준화한다.
두 번째 축은 자체 기술이다.
AVP본부와 포티투닷이 E2E(End-to-End) 방식의 Atria AI를 공동 개발하고 있다. 두 조직은 개발 환경과 업무 프로세스, 정보 공유 체계를 통합해 개발 속도를 높이고 있으며 2029년 하반기 Atria AI 기반 레벨 2++ 차량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외부의 검증된 플랫폼으로 상용화 시점을 앞당기면서 동시에 자체 AI를 키워 장기적인 기술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볼 수 있다.
연간 700만대 판매 기반을 ‘데이터 경쟁력’으로
두 전략을 연결하는 핵심이 현대차그룹이 이날 강조한 ‘데이터 플라이휠(Data Flywheel)’이다.
구조 자체는 간단하다. 차량에서 실제 주행 데이터를 모으고 이를 AI가 학습한다. 검증을 거쳐 성능이 개선된 모델을 다시 차량에 적용하면 새로운 데이터가 쌓인다. 이 데이터를 다시 학습시키는 과정이 반복된다.
중요한 것은 이 순환의 속도다.
현대차·기아는 전 세계 190여개 국가와 지역에서 연간 700만대 이상의 차량을 판매한다. 이 같은 글로벌 차량 기반이 향후 실제 도로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는 잠재적 자산이 되는 셈이다.
현재는 40여대의 데이터 수집 전용 차량을 주야간 운영하고 있다. 일반적인 도로뿐 아니라 공사구간과 악천후, 갑작스러운 차선 변경, 이면도로의 불법·임시 주정차 등 AI가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을 집중적으로 수집한다.
데이터를 무조건 많이 모으는 방식과도 거리를 뒀다. AI가 판단하기 어려워하는 장면을 자동으로 골라내는 ‘하드 이그잼플 마이닝(Hard Example Mining)’과 새로운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학습시키는 ‘컨티뉴어스 트레이닝(Continuous Training)’을 적용하고 있다.
실도로에서 발견한 약점을 다시 학습시키고 같은 상황에서 성능이 개선됐는지 검증하는 사이클을 빠르게 돌리는 방식이다.
실도로에서 얻은 장면, 가상공간에서 반복 시험
현실에서 반복하기 어렵거나 위험한 상황은 가상환경으로 가져온다.
현대차그룹은 실제 차량에서 수집한 데이터를 3차원 환경으로 재구성하고 ‘3D 가우시안 스플래팅(3D Gaussian Splatting)’ 등의 그래픽 기술을 활용해 실제와 유사한 도로 환경을 구현하고 있다.
갑작스러운 끼어들기나 위험한 도로 상황을 실제 차량으로 수없이 반복하지 않고 가상환경에서 AI를 시험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한국과 미국 개발 거점의 시차도 활용한다. 한쪽 지역의 업무가 끝나면 다른 지역에서 데이터 분석과 모델 개선을 이어가는 ‘Follow-the-Sun’ 방식으로 24시간 개발 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자율주행 중 중요한 순간을 자동으로 기록하는 ‘스페셜 이벤트 리코더(SER)’도 데이터 플라이휠에 결합한다. 급가속·급제동이나 불안정한 차간거리, 자율주행 기능 해제 등의 상황이 발생하면 관련 데이터를 기록해 이후 학습에 활용한다.
향후 현대차·기아와 포티투닷, 모셔널 등에서 생성되는 데이터를 동일한 기준으로 활용하는 ‘데이터 유니언(Data Union)’도 구축할 계획이다.
자율주행 AI, 이제 ‘왜 그렇게 운전했는지’ 설명한다
포티투닷은 이날 한 단계 더 나아간 차세대 기술도 공개했다.
시각(Vision)과 언어(Language), 행동(Action)을 하나의 AI 모델에서 처리하는 ‘VLA’ 기반 자율주행 기술이다.
현재 Atria AI가 개발 중인 E2E 방식이 카메라와 센서에서 들어온 정보를 차량 행동으로 직접 연결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VLA는 여기에 언어를 이용한 상황 이해와 추론을 더한다.
예를 들어 차량이 차선을 변경할 경우 단순히 조향 명령을 내리는 데 그치지 않고 주변 상황을 어떻게 인식했고 왜 차선을 바꾸기로 판단했는지를 언어로 표현하는 식이다.
포티투닷은 행사에서 VLA 모델이 실제 주행 상황을 해석하고 판단 근거를 문장으로 출력하는 개발 영상도 공개했다.
아직 양산 단계는 아니다. 현재 시뮬레이션을 이용해 모델을 검증하고 있으며 올해 말부터 내년 초까지 실차 테스트를 포함한 개발 프로세스를 가동할 계획이다.
VLA가 주목받는 이유는 자율주행을 넘어 로봇 등 ‘Physical AI’로 확장할 가능성 때문이다. 현실 세계를 보고 이해한 뒤 스스로 판단해 행동한다는 점에서 자동차와 로봇의 AI 기술 경계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레벨4 실도로 검증도 추진
현대차그룹은 양산형 운전자 보조 기술과 별도로 레벨4 자율주행 실증도 추진한다.
국토교통부와 협력해 연말 전남광주통합특별시에 Atria AI를 탑재한 SDV 기반 자율주행 실증차를 투입할 계획이다. 국내 도로에서 확보한 돌발 상황과 주행 시나리오는 다시 데이터 플라이휠로 보내 AI 학습에 활용한다.
결국 현대차그룹이 이날 공개한 전략의 중심에는 개별 자율주행 기능보다 ‘학습 구조’가 자리한다. 차량이 많을수록 데이터가 늘고, 데이터가 쌓일수록 AI가 개선되며, 개선된 AI가 다시 차량에 적용돼 더 많은 데이터를 확보하는 구조를 얼마나 빠르게 돌릴 수 있느냐가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판단이다.
박민우 현대차·기아 AVP본부장 겸 포티투닷 대표는 “자율주행 경쟁의 본질은 결국 학습 속도의 경쟁”이라며 “현대차그룹은 데이터와 AI, 검증이 반복되는 선순환 구조를 기반으로 고객이 신뢰할 수 있는 자율주행 기술을 빠르게 개발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술 개발 속도와 안전은 서로 상충하는 가치가 아니다”며 “더 많은 예외 상황을 발견하고 학습할수록 자율주행은 더욱 안전해질 수 있으며, 충분히 검증된 기술만 차량에 적용한다는 원칙 아래 개발 속도와 안전성을 함께 높여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