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슬’, ‘숫눈’, ‘볼우물’.
한때 우리말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지만 지금은 쉽게 접하기 어려운 단어들이다. 햇빛이나 달빛에 반짝이는 물결을 뜻하는 ‘윤슬’, 한 번도 녹거나 다져지지 않은 깨끗한 눈을 뜻하는 ‘숫눈’, 보조개를 우리말로 표현한 ‘볼우물’은 모두 사전에 남아 있지만 일상에서는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100여 년 전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단어를 모았던 선조들의 기록이 인공지능(AI)을 통해 다시 현재로 호출됐다.
SK텔레콤이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맞아 국립국어원, 국립한글박물관과 함께 ‘2026 말모이’ 캠페인을 시작한다. 핵심은 단순히 옛말을 소개하는 데 있지 않다. 역사적 기록을 AI로 분석해 사라져가는 우리말을 다시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에는 SK텔레콤의 AI 파운데이션 모델 ‘A.X K2’가 활용됐다. AI는 주시경 선생과 제자들이 남긴 우리말 사전 원고 ‘말모이’ 전체 스캔본을 분석하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과 우리말샘에 수록된 고유어까지 함께 살폈다.
그 결과물 가운데 하나가 ‘말모이체’다.
AI는 100여 년 전 사전 원고에 남아 있는 글자의 형태를 이미지로 분석했다. 특히 원고 속 ‘ㄱ(갈죽)’의 기록에서 출발해 자음과 모음의 형태를 추출하고 이를 현대적인 글꼴로 재구성했다. 과거의 손글씨 기록이 오늘날 스마트폰과 PC에서 사용할 수 있는 디지털 폰트로 바뀐 셈이다.
AI가 되살린 것은 글꼴만이 아니다.
SK텔레콤은 표준국어대사전과 우리말샘에 있는 단어 가운데 의미와 이미지가 서정적이거나 긍정적이고, 현재 사용해도 자연스러우며 제목이나 이름, 자막 등에 활용할 수 있는 단어를 AI로 선별해 ‘인공지능이 모은 아름다운 순우리말 100’으로 정리했다.
여기에는 ‘윤슬’, ‘숫눈’, ‘풋낯’, ‘볼우물’ 등이 포함됐다.
눈여겨볼 대목은 AI가 단순히 사용 빈도가 낮은 단어를 무작정 골라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래된 단어 가운데에서도 지금 시대의 언어생활에서 다시 활용할 가능성이 있는 표현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이는 AI가 언어를 단순히 번역하거나 생성하는 도구를 넘어 문화유산을 재해석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번 캠페인은 ‘말’뿐 아니라 ‘목소리’까지 되살린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된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의 육성 기록을 캠페인 영상에 담았다. 조선어학회 간사장으로 활동하며 『조선말 큰사전』 편찬을 이끈 이극로 선생의 실제 목소리와 100년 전 우리말을 기록한 문서가 AI 기술과 만나 오늘날의 콘텐츠로 재구성된다.
결국 이번 프로젝트가 던지는 질문은 ‘AI가 얼마나 똑똑한가’가 아니다. AI로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다음 세대에 남길 것인가에 가깝다.
새로운 단어가 매일 생겨나는 시대에 오래된 우리말은 사용되지 않는 순간 빠르게 잊힐 수 있다. 반면 AI는 방대한 기록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지금 시대에 다시 활용할 수 있는 표현을 찾아내는 데 강점을 갖는다.
SK텔레콤은 일반 이용자도 캠페인에 참여할 수 있도록 SNS를 통해 사투리와 세대별 신조어 등 ‘오늘의 우리말’을 모으는 활동도 진행한다. 과거의 말뿐 아니라 현재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까지 기록해 ‘말모이’의 범위를 현재로 확장하는 셈이다.
이는 과거의 우리말을 박물관 속 기록으로 남기는 방식과도 다르다. 사라져가는 옛말과 지금 살아 있는 사투리·신조어를 한데 모아 우리말의 변화 자체를 기록하는 시도다.
SK텔레콤은 ‘인공지능이 모은 아름다운 순우리말 100’ 책자를 제작해 국립한글박물관에 기증할 예정이다. 박물관이 올해를 ‘한글 기증의 해’로 선포한 가운데 민간 기업의 AI 기술과 한글 문화유산이 결합한 사례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업계에서는 이번 프로젝트가 기업의 AI 활용 영역을 기술 중심에서 문화·언어 분야로 확장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AI가 과거 자료를 학습해 새로운 콘텐츠를 만드는 것을 넘어, 잊혀가는 문화적 가치를 발굴하고 대중의 일상으로 되돌리는 방식으로 활용됐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는 평가다.
SK텔레콤 이승열 전략Comm실장은 “100여 년 전 선조들이 모은 우리말을 AI로 이어 쓰고, 누구나 쓰는 글꼴과 말로 나눌 수 있도록 이번 캠페인을 마련했다”며 “앞으로도 AI가 우리말과 우리 문화의 가치를 지키는 데 쓰일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