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태 칼럼 8 | 김인후와 필암서원 — 임금을 향한 절의와 청렴한 지성의 힘
정연태 칼럼 8 | 김인후와 필암서원 — 임금을 향한 절의와 청렴한 지성의 힘
  • Korea IT Times 편집국
  • Published 2026.10.08 03:53
  • Comments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네스코가 인정한 한국의 정신문화, 서원을 찾아서

선비의 길을 따라 걷는 세계유산 기행

필암서원, 임금을 향한 절의와 호남 성리학의 맑은 정신

 

연재 순서

이 연재는 아홉 개의 서원을 소개하는 문화유산 기행을 넘어, 한국 정신문화 700년의 흐름을 따라가는 인문학 여정이다.

제1편 | 왜 세계는 한국의 서원에 주목했는가

제2편 | 안향과 소수서원 — 한국 교육의 시작

제3편 | 퇴계 이황과 도산서원 — 공부는 어떻게 사람을 만드는가

제4편 | 류성룡과 병산서원 — 국가를 지킨 선비의 리더십

제5편 | 회재 이언적과 옥산서원 — 자연에서 완성한 철학

제6편 | 김굉필(金宏弼)과 도동서원 — 도학의 뿌리

제7편 | 정여창과 남계서원 — 지방에서 꽃핀 선비정신

제8편 | 김인후와 필암서원 — 청렴한 지성의 힘

제9편 | 최치원과 무성서원 — 통합의 사상

제10편 | 김장생과 돈암서원 — 예학이 만든 공동체

제11편 | 서원은 과거의 유산인가, 미래의 학교인가

 

글 | 정연태 건설산업정보원 원장

1. 붓처럼 곧은 바위에 새겨진 선비의 마음

전라남도 장성의 너른 들판을 지나 필암서원으로 들어서면, 먼저 느껴지는 것은 산중 서원의 깊은 적막과는 조금 다른 평온함이다. 높은 산과 깊은 계곡 속으로 몸을 숨기기보다 마을과 들판 가까이에 자리해 사람들의 생활과 호흡한다. 넓은 마당과 가지런한 건물, 낮은 담장 너머로 이어지는 산과 하늘은 이곳이 학문을 세상과 단절시키기 위한 공간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필암서원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의 학문과 절의를 기리는 서원이다. 김인후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난 1590년, 호남의 유림이 그의 고향인 장성 기산리에 처음 세웠다. 정유재란 때 불탄 뒤 1624년에 다시 세워졌고, 1662년 조정으로부터 ‘필암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1672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필암’은 붓 필(筆)과 바위 암(巖)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붓은 학문과 문장을 상징하고, 바위는 흔들리지 않는 절개를 떠올리게 한다. 글을 쓰는 붓은 부드럽지만, 그 붓으로 지켜야 할 뜻은 바위처럼 단단해야 한다. 필암서원이라는 이름에는 하서 김인후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는 뛰어난 학자였고 아름다운 문장을 남긴 시인이었으며, 임금과 스승과 벗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킨 선비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배운 도리를 권력과 출세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바로 세우기 위해 사용한 사람이었다. 필암서원은 그 바른 마음이 건축과 기록, 제향과 교육의 형태로 남은 장소이다.

2. 호남을 대표하는 선비, 하서 김인후

김인후는 1510년 전라도 장성에서 태어나 1560년에 세상을 떠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울산이고, 자는 후지, 호는 하서 또는 담재이며, 뒤에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는 조선의 문묘에 배향된 동국 18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되었다. ‘하서’라는 호는 황룡강 서쪽에서 살았다는 공간적 의미와 함께, 자연 속에서 학문과 마음을 닦았던 그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김인후는 어린 시절부터 총명함과 문재로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영리함을 자랑하거나 지식을 과시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그가 평생 추구한 것은 도학과 절의와 문장이었다. 도학은 인간과 세계의 바른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절의는 옳다고 믿는 뜻을 이해관계에 따라 바꾸지 않는 태도이다. 문장은 그 마음과 사상을 세상에 드러내는 표현이다. 이 세 가지는 김인후의 삶에서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글은 학문에서 나왔고, 그의 학문은 절의로 증명되었으며, 그의 절의는 삶의 선택을 통해 완성되었다.

필암서원이 단순히 학자를 기리는 사당을 넘어서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곳은 학문과 인격과 행동이 하나로 이어졌던 한 선비의 전 생애를 기억하는 공간이다.

3. 김안국에게 배우고 사림의 학맥을 잇다

김인후는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인 모재 김안국에게 학문을 배웠다. 김안국은 김종직의 학문을 이어받은 사림계 인물로, 지방교육과 성리학 보급에 힘쓴 학자였다. 이러한 학맥은 김종직에서 김굉필과 김안국 등으로 이어지고, 다시 김인후를 비롯한 후대의 호남 사림으로 확산되었다.

조선의 성리학은 한 사람의 책상 위에서 완성되지 않았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 묻고 답하며, 지역의 선비들이 강론하고 토론하고, 후학들이 그 삶을 기억하는 과정을 통해 학문 공동체로 성장했다. 김인후의 학문도 이러한 사승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는 단순히 옛 경전을 외우는 데 그치지 않고 성현의 말씀을 자신의 마음과 생활 속에서 확인하려 했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행동도 바르기 어렵고, 행동이 바르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지식을 지녀도 참된 선비라 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성리학에서 공부는 지식을 더하는 일인 동시에 욕심을 덜어내는 일이었다. 배운다는 것은 자신을 크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마음속의 사사로움을 줄이는 과정이었다. 필암서원의 확연루와 청절당, 진덕재와 숭의재는 바로 그러한 수양의 교육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다.

4. 과거에 급제하고 왕세자의 스승이 되다

김인후는 1540년 문과에 급제한 뒤 관직에 나아갔다. 홍문관박사와 세자시강원설서 등을 지내며 왕세자를 가르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왕세자는 훗날 조선 제12대 임금이 되는 인종이었다.

세자시강원의 관원은 단순히 글과 경전을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었다. 왕세자가 어떤 임금이 되어야 하는지, 권력을 어떤 마음으로 사용해야 하는지, 백성과 신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정치적·도덕적 스승이었다. 김인후와 인종의 관계도 단순한 군신관계를 넘어섰다. 인종은 김인후의 학문과 인품을 신뢰했고, 김인후는 왕세자가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경전과 도리를 가르쳤다.

국가유산청이 소개하는 묵죽도 이야기에도 두 사람 사이의 신뢰가 담겨 있다. 인종은 세자 시절 스승인 김인후에게 직접 그린 묵죽도를 내린 것으로 전해지며, 필암서원은 이와 관련한 묵죽도판과 유묵을 간직해 왔다. 대나무는 속이 비어 있으면서도 곧게 자란다. 눈과 바람에 휘어질 수는 있어도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선비들은 대나무에서 겸허함과 절개를 보았다.

인종이 김인후에게 건넨 묵죽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스승의 곧은 인품을 향한 존경의 표시였다고 볼 수 있다.

5. 너무 짧았던 인종의 시대

1544년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인종이 왕위에 올랐다. 인종은 사림을 등용하고 정치의 폐단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재위 기간은 매우 짧았다. 그는 즉위한 지 약 8개월 만인 1545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인후에게 인종의 죽음은 단순히 임금 한 사람을 잃은 사건이 아니었다.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이자 새로운 정치를 기대했던 군주를 잃은 일이었다. 인종이 죽은 뒤 왕위는 명종에게 넘어갔고, 외척 세력의 갈등 속에서 을사사화가 일어나 많은 사림이 희생되었다.

김인후는 정치의 중심으로 다시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장성으로 돌아가 은거하며 학문과 교육에 전념했다. 이후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려졌지만 적극적으로 관직에 복귀하지 않았다. 그의 물러남은 세상을 외면한 도피라기보다 자신의 뜻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바른 정치를 펼칠 수 없는 권력 안에 머무르는 것보다, 고향에서 후학을 기르고 도학을 지키는 길을 택한 것이다.

김인후는 매년 인종의 기일이 돌아오면 술을 마시고 곡하며 임금을 추모했다고 전해진다. 우리역사넷은 그를 인종에 대한 절의를 지킨 충신으로 기억하며, “해마다 칠월이면 온 산중에 통곡소리”라는 의미의 시구가 그의 충절을 상징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의 충절은 권력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충성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권력에는 가까이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믿었던 임금과 도리에 대한 의리는 끝까지 지켰다.

6. 을사사화의 시대와 선비의 물러남

인종이 죽은 뒤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왕실 외척 사이의 갈등이 심해졌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 윤임을 비롯한 대윤 세력과 많은 사림이 제거되었다. 정치가 도덕과 공론이 아니라 외척과 권력투쟁에 좌우되는 시대가 펼쳐졌다. 김인후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벼슬길을 떠났다.

성리학에서 출처의 문제는 선비에게 매우 중요했다. ‘출’은 세상에 나아가 벼슬하며 도를 실천하는 일이고, ‘처’는 때가 바르지 않을 때 물러나 자신의 도를 지키는 일이다. 언제 나아가고 언제 물러날 것인가. 그 판단은 개인의 성공 여부가 아니라 도의 실현 가능성을 기준으로 해야 했다.

김인후의 삶은 ‘처’의 정신을 보여준다. 그는 권력으로부터 멀어졌지만 세상에 대한 책임까지 버리지는 않았다. 고향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학문을 닦으며 지역의 성리학 전통을 세웠다. 정치의 중심에서 물러났지만 정신의 중심에서는 물러나지 않았다.

이러한 선택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조직과 권력 안에 남아 있는 것이 언제나 책임 있는 행동인가.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물러나는 것도 때로는 더 큰 책임이 될 수 있지 않은가. 필암서원은 선비의 물러남이 침묵이나 패배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바른 때를 기다리며 학문과 사람을 지키는 일도 하나의 역사적 실천이었다.

7. 하서의 학문, 천명과 인간의 마음

김인후의 성리학은 우주와 인간, 하늘의 이치와 인간의 마음을 하나의 질서 속에서 이해하려는 학문이었다. 그의 대표적 저술 가운데 하나인 「천명도」는 하늘의 명과 인간의 본성, 우주의 이치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도식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성리학에서 천명은 단순히 하늘이 인간에게 내리는 운명이나 명령만을 뜻하지 않는다. 인간과 만물 안에 깃든 도덕적 원리이며, 사람이 마땅히 따라야 할 본성의 근거이다.

인간의 마음이 사사로운 욕심에 가려지지 않으면 그 안의 본래적 선함과 도덕적 원리가 드러난다고 보았다. 따라서 학문의 목적은 외부의 지식을 끝없이 모으는 데 있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욕망과 편견을 걷어내며, 본래의 밝은 성품을 회복하는 데 있었다. 김인후에게 학문은 우주에 대한 철학이면서 동시에 일상에 대한 윤리였다.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스승과 제자, 벗과 벗 사이에서 지켜야 할 의리를 실천하지 못한다면 우주의 원리를 아무리 잘 설명해도 온전한 학문이라 할 수 없었다. 필암서원의 교육도 이러한 학문관 위에서 이루어졌다. 유생은 책을 읽는 것만으로 공부를 마치지 않았다. 자신의 언행을 돌아보고, 스승에게 예를 다하고, 동료와 신의를 지키며, 공동체에 책임지는 생활을 배웠다. 학문은 머릿속에 머무는 지식이 아니라 인간관계와 행동 속에서 확인되는 도리였다.

8. 기대승과 호남 성리학의 성장

김인후는 호남지역의 성리학 발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학문과 인품을 따르던 많은 제자가 장성과 광주, 담양을 비롯한 호남 곳곳에서 활동했다. 기대승을 비롯한 호남의 학자들과 교유하며 이 지역의 성리학적 학문 풍토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호남 성리학은 단순히 중앙의 학문을 지역으로 옮겨놓은 것이 아니었다. 지역의 자연과 역사, 인물과 교육 전통 속에서 독자적인 학문 공동체를 만들었다. 선비들은 서원과 정자, 누정을 오가며 경전을 강론하고 시를 지으며 정치와 인간의 도리를 토론했다. 김인후의 학문은 이러한 호남 사림의 정신적 중심이 되었다.

후대 사람들은 그를 도학과 절의와 문장에 모두 뛰어난 인물로 평가했고, 필암서원은 호남을 대표하는 유학의 본산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필암서원 관련 공식 소개에서도 김인후는 호남의 유종으로 추앙되는 학자로 설명되며,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 양자징이 함께 배향되어 있다. 양자징은 김인후의 학문을 이어받아 후대에 전한 인물이다. 1786년 양자징이 필암서원에 추가로 배향되면서 서원은 스승 한 사람만을 모시는 공간을 넘어 학맥의 계승을 보여주는 장소가 되었다.

스승의 학문은 제자를 통해 생명을 얻는다. 제자는 스승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뜻을 자신의 시대 속에서 다시 살아내는 사람이다. 필암서원은 이러한 사승의 관계가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9. 전쟁으로 무너지고 세 번 자리를 옮기다

필암서원은 1590년 김인후의 고향 기산리에 처음 세워졌다. 그러나 창건 7년 만인 1597년 정유재란의 병화로 소실되었다. 전쟁은 사람과 마을만 파괴한 것이 아니었다. 책과 목판, 사당과 학교, 공동체의 기억을 함께 불태웠다.

호남의 유림은 김인후의 정신을 잊지 않았다. 1624년 황룡면 증산동에 서원을 다시 세웠고, 이후 수해의 우려와 공간적 조건을 고려해 1672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옛 진원현 객사 건물을 옮겨 강당인 청절당으로 삼고, 확연루를 세워 서원의 모습을 갖추었다.

필암서원의 역사는 이동과 재건의 역사이다. 서원의 자리는 바뀌었지만, 그 안에 모신 정신은 바뀌지 않았다. 건물이 불타면 다시 세우고, 터가 불안하면 더 적절한 곳으로 옮겼다. 문화유산은 처음 만들어진 모습만으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다. 그 가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돌보고 다시 세울 때 살아남는다.

오늘날 필암서원에서 만나는 건물들은 단순히 17세기의 목조건축이 아니다. 전쟁과 수해, 정치적 변화 속에서도 김인후의 학문과 절의를 계승하려 했던 수많은 사람의 선택이 쌓인 결과이다.

10. 확연루, 마음을 크게 열어 공평무사하게 하다

필암서원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건물은 확연루이다. 확연루는 1층이 출입문이고 2층이 유생과 선비들이 쉬며 교류하는 누각으로 사용된 중층 건물이다. ‘확연’은 중국 송대의 성리학자 정호가 말한 ‘확연대공’에서 가져온 것으로, 마음을 활짝 열어 사사로움 없이 크게 공평하다는 뜻을 담는다.

서원에 들어가는 사람은 확연루 아래를 지나야 한다. 문을 통과하는 행위는 외부 공간에서 내부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세상의 분주함과 사사로운 욕망을 내려놓고 학문과 수양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확연루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시열은 김인후의 도학과 절의를 높이 평가했던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이다. 누각은 단순히 경치를 바라보는 휴게시설이 아니었다. 선비들은 이곳에서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며 손님을 맞이하고 마음을 쉬게 했다.

성리학의 수양은 긴장과 억제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연을 바라보고 바람을 맞으며 마음을 맑게 하는 유식의 시간도 필요했다. 확연루는 공부와 휴식, 학문과 풍류가 서로 분리되지 않았던 서원문화를 보여준다.

11. 청절당, 맑은 절의를 배우는 강당

확연루를 지나면 강학공간의 중심인 청절당이 나타난다. ‘청절’은 맑고 깨끗한 절개를 뜻한다. 정치적 이익을 좇지 않고 인종에 대한 의리와 자신의 도학적 신념을 지킨 김인후의 삶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청절당은 유생들이 모여 경전을 배우고 토론하며 서원의 주요 행사를 열던 공간이었다. 옛 진원현 객사 건물을 옮겨 강당으로 사용했으며, 청절당과 여러 건물의 현판에는 조선의 명필과 학자들이 남긴 글씨가 전한다. 필암서원의 청절당은 일반적인 서원 강당과 비교할 때 독특한 방향성을 보인다.

입구의 확연루를 바라보기보다 뒤쪽의 사당인 우동사를 향하도록 배치되었다. 동재와 서재 역시 사당을 의식하는 방향으로 구성되어 유생들이 공부하고 생활하면서도 선현의 존재를 늘 기억하도록 했다. 이 배치는 건축으로 표현한 교육철학이다. 배움의 목적은 스승의 삶을 닮는 데 있다.

경전을 많이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강당에서 배우는 모든 지식은 사당에 모신 김인후의 절의와 실천으로 이어져야 했다. 청절당은 말한다. 학문은 좋은 문장을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맑은 마음과 굳은 절개를 기르는 일이라고.

12. 진덕재와 숭의재, 생활이 곧 공부였던 공간

청절당의 좌우에는 유생들이 머물던 동재와 서재가 있다. 진덕재와 숭의재이다. ‘진덕’은 덕을 나아가게 한다는 뜻이고, ‘숭의’는 의로움을 높인다는 의미이다. 건물의 이름만 보아도 서원교육이 무엇을 목표로 했는지 알 수 있다.

유생들은 이곳에서 잠을 자고 책을 읽고 식사하며 함께 생활했다. 오늘날의 학교처럼 수업시간과 생활시간이 뚜렷하게 분리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는 태도, 옷을 입는 법, 어른에게 인사하는 자세, 친구와 의견이 다를 때 말하는 방식, 물건을 아껴 쓰는 습관까지 모두 공부의 일부였다.

성리학은 인간의 마음과 행동이 일상의 작은 습관을 통해 형성된다고 보았다. 큰 도덕은 거창한 선언에서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다. 작은 약속을 지키고, 말을 삼가며,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반복된 생활 속에서 만들어진다. 진덕재와 숭의재는 유생이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절제하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익힌 공간이었다. 서원은 지식을 가르치는 장소이기 이전에 사람을 만드는 장소였다.

13. 우동사와 경장각, 제향과 기록의 공간

필암서원의 가장 안쪽에는 사당인 우동사가 자리한다. 우동사에는 김인후를 주향하고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양자징을 함께 배향한다. 강학공간 뒤에 제향공간을 두는 전학후묘의 기본질서를 따르면서도, 강당과 재사가 사당을 향하도록 구성한 점에서 필암서원만의 강한 제향 중심성이 드러난다.

‘우동’이라는 이름은 동방의 도학자를 우러른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제향은 죽은 사람을 신격화하는 의례가 아니었다. 후학이 선현의 학문과 삶을 기억하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는 교육적 실천이었다.

사당 가까이에는 경장각이 있다. 경장각은 귀중한 서책과 문서, 유물을 공경스럽게 보관하는 장소이다. 필암서원에는 인종과 김인후의 관계를 보여주는 묵죽도 관련 자료와 하서유묵 목판, 서원운영을 보여주는 각종 고문서가 전해진다.

건물과 제례만 남아 있다면 우리는 옛 서원의 정신을 일부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필암서원에는 누가 원장을 맡았는지, 어떤 유생이 공부했는지, 재산과 노비를 어떻게 관리했는지, 어떤 책과 물품을 보유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들은 서원이 추상적인 철학의 장소가 아니라 실제 사람과 재정, 노동과 교육이 함께 움직이던 생활공동체였음을 알려준다.

14. 필암서원 문적, 서원의 일상을 기록하다

필암서원의 특별한 가치는 풍부한 문서와 목판에 있다. ‘필암서원 문적 일괄’은 15책 65장으로 전해지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여기에는 원장을 기록한 원장선생안, 서원운영과 유생에 관한 명부, 재산과 노비관리 등을 보여주는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자료는 조선시대 서원이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기록이다. 서원은 제사를 지내고 경전을 읽는 장소만이 아니었다. 토지와 재산을 관리하고, 유생을 선발하며, 원장과 임원을 정하고, 책을 보관하고, 제향에 필요한 물품을 마련해야 했다. 하나의 작은 교육기관이자 지역사회의 행정적·경제적 공동체였다.

한국관광공사의 소개에 따르면 필암서원에는 1624년부터 1900년 무렵까지 역대 원장을 적은 《원장선생안》, 유생명부인 《서재유안서》, 재산을 기록한 《필암서원원적》, 노비를 계보 형식으로 기록한 《노비보》 등이 전한다.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면 노비 관련 기록은 조선사회의 신분질서와 불평등을 보여주는 불편한 자료이기도 하다. 문화유산을 바라볼 때 아름다운 건축과 고결한 정신만을 선택적으로 기억해서는 안 된다. 서원이 지닌 교육적 가치와 함께 당시 사회의 계급구조, 특권, 노동관계도 살펴야 한다.

기록유산의 진정한 가치는 과거를 미화하는 데 있지 않다. 과거의 빛과 그늘을 함께 드러내어 오늘의 사회가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넘어설지 판단하게 하는 데 있다.

15. 인종이 내린 묵죽, 스승과 제자의 신뢰

필암서원의 유물 가운데 특히 마음을 끄는 것은 묵죽도와 관련된 기록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인종은 세자 시절 스승이었던 김인후에게 자신이 그린 대나무 그림을 내렸다. 김인후는 이 그림을 소중히 간직했고, 후대에는 묵죽도를 목판에 새겨 그 뜻을 전했다. 국가유산청은 이를 인종과 김인후 사이의 존경과 신뢰를 보여주는 자료로 설명한다.

대나무는 동양의 선비문화에서 특별한 상징이었다. 줄기는 곧고 속은 비어 있다. 사계절 푸른빛을 잃지 않으며 바람과 눈을 견딘다. 곧음은 절개를, 비어 있음은 겸허함을, 푸름은 변치 않는 마음을 상징한다.

인종이 김인후에게 대나무 그림을 건넨 장면을 떠올리면 한 임금과 신하보다 한 제자와 스승의 마음이 먼저 보인다. 왕세자는 스승의 곧은 인품을 대나무에 담았고, 스승은 제자의 기대와 신뢰를 평생 잊지 않았다. 인종이 짧은 생을 마친 뒤 김인후가 벼슬을 떠나 매년 곡한 것도 단순한 정치적 충성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 안에는 자신이 가르친 제자를 지키지 못했다는 슬픔과 함께 이루지 못한 정치적 이상에 대한 비통함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필암서원의 묵죽은 그림 한 점을 넘어선다. 스승과 제자, 학문과 정치, 신뢰와 절의가 한 줄기의 대나무로 이어지는 정신의 기록이다.

16. 서원 철폐령에도 남은 호남의 중심 서원

조선 후기에 서원 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여러 문제가 나타났다. 일부 서원은 교육과 제향이라는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지역 양반의 세력기반이 되었고,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누리며 국가재정과 지방행정에 부담을 주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은 1860년대 후반 전국의 서원을 대대적으로 철폐했다. 수백 곳의 서원이 사라지고 47곳만 남았다.

필암서원은 철폐되지 않고 존속한 서원 가운데 하나였다. 공식 관광자료도 김인후의 도학과 절의, 문장을 기리는 필암서원이 서원철폐령에도 남은 유서 깊은 서원임을 설명한다. 필암서원이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김인후의 높은 학문적 위상, 문묘 배향이라는 상징성, 호남 유림의 중심서원으로서의 역할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 서원의 모든 역사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서원은 도덕과 교육의 공간인 동시에 조선 후기에는 신분질서와 지역권력이 작동하던 장소이기도 했다. 문화유산을 성숙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두 측면을 모두 이해하는 일이다. 필암서원의 맑은 절의는 계승하되, 봉건적 특권과 신분차별은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과거를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문화의 계승은 아니다. 과거가 남긴 가장 좋은 정신을 오늘의 보편적 가치와 연결할 때 비로소 문화유산은 살아 있는 의미를 갖는다.

17. 유네스코가 인정한 필암서원의 가치

필암서원을 포함한 아홉 곳의 서원은 2019년 7월 6일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이 연속유산은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으로 구성된다. 유네스코는 이들 서원이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에 형성된 조선시대 성리학 교육기관의 대표적 사례이며, 한국에서 성리학이 지역사회와 결합해 발전한 문화전통을 보여주는 탁월한 증거라고 평가했다.

아홉 서원은 각각 서로 다른 학자와 지역, 경관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교육, 제향, 교류와 유식의 기능을 수행했다. 필암서원은 특히 호남지역 성리학의 발전과 김인후의 도학·절의를 보여주는 대표 유산이다.

또한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 질서정연한 중심축과 좌우대칭의 건물배치를 이루고, 강학공간이 제향공간을 강하게 의식하도록 구성한 점에서 독특한 건축적 특징을 가진다. 주요 건물은 남북 중심축을 따라 확연루, 청절당, 동재와 서재, 내삼문, 사당의 순서로 배치되어 전학후묘의 질서를 이룬다.

유네스코가 인정한 것은 오래된 목조건물만이 아니다. 서원이 지역의 지식공동체를 형성하고, 선현을 기억하며, 학문과 생활을 결합하고, 자연과 건축을 수양의 환경으로 만들었던 문화적 체계이다. 필암서원은 건축과 유물, 고문서, 제향의 전통이 함께 남아 있어 서원의 실제 운영과 정신세계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18. 산중의 은둔보다 마을의 질서를 택한 서원

필암서원의 경관은 다른 산지 서원들과 조금 다르다. 웅장한 절벽이나 굽이치는 강을 앞에 둔 극적인 풍경보다는 비교적 평탄하고 열린 들판과 마을 가까이에 자리한다. 이러한 입지는 필암서원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학문은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만의 것이 아니었다. 지역사회 안에서 사람을 가르치고, 제사를 지내며, 도덕적 질서를 형성하는 공공의 활동이었다. 필암서원의 건물은 강한 중심축과 좌우대칭을 이룬다. 이는 질서와 균형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공간관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 질서는 사람을 억압하기 위한 기계적 통제가 아니라 마음과 행동을 바르게 정돈하려는 상징이었다. 확연루에서 마음을 열고, 청절당에서 학문을 배우며, 진덕재와 숭의재에서 생활을 닦고, 우동사에서 스승을 기억한다. 건물 하나하나가 인간이 성숙해 가는 과정과 연결된다.

서원에 들어와 가장 안쪽 사당에 이르는 길은 단순한 동선이 아니다. 사사로운 마음에서 공평한 마음으로, 지식에서 실천으로, 개인의 욕망에서 공동체의 책임으로 나아가는 정신의 길이다.

19. 인공지능 시대에 다시 읽는 필암서원

오늘날 우리는 김인후가 상상하기 어려웠던 지식환경 속에 살고 있다. 인공지능은 수많은 문서를 읽고 요약하며, 인간의 질문에 빠르게 답하고, 글과 그림과 음악까지 만들어낸다. 지식의 생산과 전달 속도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라졌다. 그러나 필암서원은 우리에게 지식보다 앞선 질문을 건넨다. 그 지식을 어떤 마음으로 사용할 것인가.

김인후가 추구한 학문은 정보를 많이 소유하는 능력이 아니었다. 마음을 공평하게 하고, 욕심을 절제하며, 옳은 관계와 의리를 지키는 힘이었다. 인공지능은 성리학의 문헌을 정리할 수 있고 김인후의 글을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임금이 죽은 뒤 권력의 부름을 거절하고 자신의 절의를 지킬 것인지 결정하는 일은 대신할 수 없다.

무엇이 옳은지를 계산하는 것과, 옳다고 판단한 것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기계는 판단을 도울 수 있지만 책임을 살아낼 수는 없다. 필암서원의 가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롭게 살아난다.

인공지능 시대의 교육은 더 많은 지식을 가르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지식을 검증하는 능력,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 거짓과 편견을 경계하는 마음, 기술의 결과에 책임지는 윤리가 함께 필요하다. 확연루가 말하는 공평무사함과 청절당이 상징하는 맑은 절의는 첨단기술 시대에도 낡지 않은 인간의 기준이다.

20. 붓은 부드럽지만 뜻은 바위처럼

필암서원의 마당에 서면 건물들은 큰 목소리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확연루의 문을 지나 청절당을 바라보고, 진덕재와 숭의재 사이를 걸어 우동사에 이르면 한 선비의 삶이 공간의 순서로 펼쳐진다.

마음을 열고, 학문을 배우고, 생활 속에서 덕을 닦고, 마지막에는 스승과 선현의 삶 앞에서 자신을 돌아본다. 그것이 필암서원이 가르치는 선비의 길이다.

김인후는 높은 벼슬로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짧은 생을 살다 간 임금에 대한 의리를 지켰고, 권력의 혼란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학문과 제자를 지켰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호남의 선비들은 그의 마음을 서원으로 세웠다.

전쟁으로 불타자 다시 세웠고, 물길이 위협하자 더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책과 목판, 문서와 제례를 보존하며 수백 년 동안 기억을 이어왔다. 필암서원의 붓은 지금도 글을 쓴다. 종이 위에 먹으로 쓰는 글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남기는 글이다.

붓은 부드럽게 움직이지만, 그 붓이 기록하는 뜻은 바위처럼 단단하다. 세상의 권력은 바뀌고 제도는 사라지며 사람의 이름도 흐려진다. 그러나 바르게 살고자 한 마음은 누군가가 기억하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필암서원은 오늘도 조용히 묻는다. 많이 아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는 것을 바르게 살아내는 사람이 될 것인가.

선비의 길은 과거의 길이 아니다. 그 길은 지식이 넘치지만 마음의 기준을 잃기 쉬운 오늘, 우리가 다시 걸어야 할 인간의 길이다.

다음 편 예고

제9편 | 최치원과 무성서원 — 통합의 사상

필자 소개

정연태(필명: 만리풍취)는 문화사상가이자 정책전략가다. 역사와 철학, 과학기술을 연결하는 융합적 관점에서 한국의 전통문화를 현대 문명과 AI 시대의 미래 가치로 재해석하는 연구와 집필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영문판 보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Comments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Independent journalism on technology, industry and the forces reshaping Korea and the world.
  • Korea IT Times Co., Ltd. | 34 Gukjegeumyung-ro 8-gil, Yeongdeungpo-gu, Seoul, Republic of Korea
  • Business Registration No. 206-86-32195
  • Tel. +82-2-578-0434 | 010-2442-9446 | info@koreaittimes.com
  • Publisher & Editor-in-Chief: Younsoo Chung | Youth Protection Manager: Choul-woong Yeon
  • ©2004–2026 Korea IT Times. All rights reserved.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