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TSMC가 미국 투자 규모를 2,650억달러(약 393조원)로 확대하며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에 다시 한번 승부수를 던졌다. 인공지능(AI) 수요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장기간 이어질 구조적 성장이라는 확신 아래 공격적인 설비 투자를 이어가는 동시에, 최첨단 기술의 핵심은 대만에 유지하는 '투트랙 전략'을 분명히 했다.
TSMC는 최근 실적 발표 이후 열린 콘퍼런스콜에서 미국 애리조나 반도체 클러스터를 대폭 확대하는 계획을 재확인했다. 현재 추진 중인 프로젝트가 모두 완료되면 현지에는 첨단 반도체 생산공장과 첨단 패키징 시설, 연구개발(R&D) 센터 등을 포함한 총 12개의 핵심 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이번 투자는 미국 내 첨단 반도체 공급망 구축을 강화하려는 고객사들의 요구와 미국 정부의 반도체 육성 정책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애플과 엔비디아, AMD, 브로드컴 등 주요 AI 반도체 고객들이 생산 거점을 미국으로 다변화하려는 움직임과도 맞물려 있다.
TSMC 경영진은 시장 경쟁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웬델 황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콘퍼런스콜에서 "우리는 핵심 경쟁력과 비즈니스 모델에 대해 매우 큰 자신감을 갖고 있다"며 "경쟁사들도 훌륭한 기업이지만 우리는 그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발언이 삼성전자와 인텔 등 경쟁사를 의식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현재 TSMC는 첨단 공정 수율과 고객 기반, 생산 규모에서 경쟁사들을 앞서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AI 칩 시장 확대의 최대 수혜 기업으로 꼽힌다.
시장조사업체들에 따르면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는 절반이 넘는 점유율을 유지하며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3나노와 2나노 등 최첨단 공정에서는 엔비디아와 AMD, 애플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주문이 집중되고 있다.
최근 일각에서는 AI 투자 과열과 데이터센터 공급 과잉 가능성을 제기하며 'AI 거품론'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그러나 TSMC는 이러한 우려를 일축했다. 황 CFO는 "해외 사업 확대는 고객 수요와 정부 지원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한다"며 "현재 고객들의 수요는 매우 강력하며 앞으로도 수년에 걸쳐 구조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AI 서버와 고성능 컴퓨팅(HPC), 자율주행, 산업용 AI 등 다양한 분야에서 첨단 반도체 수요가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에 따른 것이다. 실제로 엔비디아를 비롯한 주요 AI 칩 기업들은 차세대 GPU와 AI 가속기 출시를 이어가고 있으며, 글로벌 클라우드 기업들도 AI 데이터센터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미국 투자 확대에도 불구하고 TSMC는 핵심 기술 유출 우려에는 선을 그었다. 회사는 앞으로 수년간 대만에 첨단 패키징 시설과 차세대 생산라인을 지속적으로 구축해 연구개발과 최첨단 제조 기술의 중심은 대만에 유지하겠다는 방침을 재확인했다.
이는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응해 생산 거점을 다변화하면서도 핵심 기술 경쟁력만큼은 대만에 집중시키겠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첨단 패키징은 AI 반도체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공정으로 평가받으며, 최근 AI 칩 수요가 급증하면서 생산능력 확보가 반도체 기업들의 새로운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천문학적인 투자 재원 마련 방식에도 관심이 쏠렸다. TSMC는 미국 증시에서 신주를 발행해 기존 주주의 지분을 희석하기보다는 시장 상황이 우호적일 경우 회사채 발행을 우선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시장에서는 안정적인 현금흐름과 높은 수익성을 바탕으로 TSMC가 대규모 투자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번 투자 확대가 단순한 생산능력 확충을 넘어 AI 시대 반도체 주도권을 굳히기 위한 전략적 결정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전자와 인텔이 첨단 공정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대규모 투자를 이어가고 있지만, TSMC는 고객 기반 확대와 생산능력 선점, 첨단 패키징까지 아우르는 생태계를 구축하며 경쟁사와의 격차를 더욱 벌리겠다는 전략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AI 반도체 시장에서는 생산능력 자체가 곧 경쟁력"이라며 "TSMC는 고객 확보와 공정 기술, 첨단 패키징을 동시에 강화하면서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 투자 확대는 글로벌 공급망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지만, 핵심 기술을 대만에 유지하겠다는 전략은 기술 주도권을 끝까지 놓지 않겠다는 의미"라며 "당분간 TSMC 중심의 AI 반도체 생태계는 더욱 공고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