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공동 취재팀
타이베이— 6월 2일 개막된 COMPUTEX 2026 전시장은 올해도 인공지능(AI)이 지배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체감한 변화는 단순히 더 강력한 AI 칩이나 더 큰 데이터센터가 아니었다. AI가 실제 물리 세계에서 움직이고 판단하는 ‘Physical AI’ 시대로 산업의 무게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변화의 흐름 속에서 한국 기업들의 존재감도 한층 커졌다. 올해 COMPUTEX에는 총 39개의 한국 기업이 참가했다. 참가 기업 수에서는 대만에 미치지 못하지만, AI 반도체와 로보틱스, 디스플레이, 메모리, 엣지 컴퓨팅 분야에서 보여준 기술력은 글로벌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강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LG전자 등 대기업부터 초저전력 AI 반도체 스타트업까지 한국 기업들은 Physical AI와 Edge AI를 중심으로 미래 AI 산업의 핵심 축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AI 인프라를 떠받치는 한국의 대기업들
전시장 곳곳에서는 AI 산업의 기반이 되는 메모리와 디스플레이, 시스템 솔루션 분야에서 한국 기업들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삼성전자와 삼성디스플레이는 AI 메모리(HBM), 차세대 디스플레이, 시스템 솔루션 기술을 중심으로 글로벌 고객사들과 협력 확대에 나섰다. AI 데이터센터와 로보틱스, AI PC 시장 확대에 맞춰 고성능 패널과 AI 연계 하드웨어 솔루션을 선보이며 공급망 중심 기업을 넘어 응용 시장을 겨냥한 전략을 드러냈다.
삼성전자의 핵심 경쟁력은 AI 연산을 뒷받침하는 메모리와 시스템 반도체, 온디바이스 AI 생태계와 연결된다. HBM은 대규모 AI 학습과 추론에서 GPU와 가속기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부품으로, 데이터 이동 병목을 줄이고 고속 연산을 가능하게 한다. 삼성디스플레이는 AI PC와 로보틱스, 차량용 디스플레이 시장을 겨냥해 고해상도·저전력·고휘도 패널 기술을 강조했다. Physical AI 시대에는 로봇과 차량, 산업 장비가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인터페이스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디스플레이 기술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SK하이닉스는 AI 산업의 핵심 부품으로 떠오른 HBM(High Bandwidth Memory)을 중심으로 AI 데이터센터 시장 공략에 집중했다. AI 학습과 추론 성능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가 연산 칩뿐 아니라 메모리 대역폭과 전력 효율로 이동하면서 SK하이닉스는 NVIDIA 공급망의 핵심 파트너로서 위상을 더욱 강화하는 모습이었다. HBM은 여러 개의 DRAM을 수직으로 쌓아 GPU와 가까운 거리에서 대용량 데이터를 빠르게 주고받는 구조로, 대규모 AI 모델 운영에 필요한 고속 데이터 처리를 가능하게 한다.
LG전자와 LG디스플레이는 로보틱스와 AI PC, 산업용 디스플레이 솔루션을 중심으로 전시를 진행했다. LG전자는 로봇과 스마트 공간, AI 기반 가전 기술을 연결하는 방향성을 보여줬고, LG디스플레이는 고성능 디스플레이가 로봇·모빌리티·AI PC의 사용자 경험을 결정하는 핵심 부품이 되고 있음을 강조했다. Physical AI가 공장, 병원, 물류센터, 가정으로 확산될수록 센서와 연산 장치뿐 아니라 사람이 결과를 확인하고 명령을 주고받는 화면 기술의 역할도 커질 수밖에 없다.
현장 관계자들에 따르면 한국 주요 기업들은 전시 부스 운영뿐 아니라 ‘Korea Partner Night’ 등 다양한 비공개 네트워킹 행사에도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글로벌 AI 생태계를 이끄는 기업들과의 공급망 협력은 물론 장기적 전략 파트너십 확대 방안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대기업들의 위치는 단순 부품 공급자에서 AI 인프라와 응용 생태계를 함께 설계하는 전략 파트너로 이동하고 있다.
InnoVEX를 빛낸 한국 AI 반도체 스타트업
올해 COMPUTEX에서 가장 눈에 띄는 한국 기업군은 단연 AI 반도체 스타트업들이었다. 스타트업 전용 전시관인 InnoVEX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차세대 AI 컴퓨팅 기술을 집중적으로 선보이며 투자자와 글로벌 기업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들이 내세운 공통 키워드는 저전력, 경량화, 현장 적용성이다.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기업 가운데 하나는 DEEPX였다. TaiNEX 1 전시장 M1311a 부스에 자리한 DEEPX는 초저전력 NPU(Neural Processing Unit) 기술을 중심으로 Edge AI 시장 공략에 나섰다. NPU는 신경망 연산에 특화된 반도체로, 이미지 인식과 객체 탐지, 음성 처리, 이상 감지 같은 AI 추론 작업을 낮은 전력으로 처리하는 데 초점을 둔다.
DEEPX의 대표 제품인 DX-M1은 25 TOPS 성능을 제공하면서도 소비 전력을 1~5 W 수준으로 낮춘 것이 특징이다. 이는 고전력 GPU가 필요했던 일부 AI 추론 기능을 카메라, 산업 장비, 로봇, 임베디드 시스템 안에서 직접 수행할 수 있게 한다. DX-H1 Quattro는 최대 100 TOPS급 성능을 구현해 복수의 카메라 입력, 실시간 영상 분석, 로봇 제어, 스마트팩토리 장비 등 더 복잡한 Physical AI 환경을 겨냥한다.
DEEPX는 GPU 대비 20배 이상의 전력 효율을 강조하며 “AI for Everyone & Everywhere”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현장에서는 산업용 컴퓨터 전문기업 AAEON과의 협력을 기반으로 한 양산 전략과 다양한 산업용 데모가 공개됐다. 부스에서는 로보틱스와 비디오 감시, 스마트팩토리 분야에서 활용 가능한 Edge AI 솔루션 시연이 이어졌고, 방문객들은 AI 연산이 클라우드가 아니라 현장 장비 안에서 즉시 처리되는 구조에 주목했다.
Mobilint 역시 AI 추론 칩 기술을 선보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Mobilint의 솔루션은 이미지 인식과 엣지 AI 처리에 특화되어 있으며 CCTV, 드론, 자율주행, 산업용 검사 장비 등 실시간 판단이 필요한 분야를 겨냥한다. 클라우드로 데이터를 보내지 않고 현장에서 바로 추론을 수행하면 지연시간을 줄이고 개인정보·보안 리스크도 낮출 수 있다는 점에서 엣지 AI 시장의 수요와 맞물린다.
Alsemy는 저전력·고효율 NPU 설계 기술을 중심으로 AI 반도체 시장의 틈새를 공략했다. AI 반도체 경쟁이 단순 성능 경쟁에서 전력 효율과 제품 적용성 경쟁으로 이동하는 상황에서, Alsemy와 같은 설계 중심 기업은 다양한 산업 장비와 임베디드 기기에 최적화된 AI 가속 기술을 제공할 수 있다. A Barristor Company는 차세대 반도체 소재 및 소자 기술을 공개하며, AI 반도체가 직면한 전력·발열·집적도 문제를 소재 차원에서 해결하려는 접근을 제시했다.
3D Architech는 AI 칩의 성능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주목받고 있는 3D 적층 패키징 기술을 선보였다. AI 반도체는 더 많은 연산 장치와 메모리를 좁은 공간 안에 배치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칩 간 연결 속도와 발열 관리가 중요해진다. 3D 적층 기술은 칩을 수직으로 쌓아 고밀도 구성을 가능하게 하고, 데이터 이동 거리를 줄여 성능과 전력 효율을 동시에 개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세대 AI 컴퓨팅의 핵심 기술로 평가된다.
로보틱스와 AIoT 분야로 확장되는 K-AI
AI 반도체 외에도 한국 기업들은 로보틱스와 AIoT(AI+IoT) 분야에서 적극적인 기술 시연에 나섰다. COSMOS LAB과 BWAVE 등은 AI가 물리 세계와 직접 상호작용하는 다양한 Physical AI 시나리오를 소개하며 관람객들의 관심을 모았다. AIoT는 센서와 네트워크, AI 추론 기술을 결합해 현장에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판단하며 장비를 제어하는 구조를 말한다.
COSMOS LAB과 BWAVE가 보여준 방향성은 단순히 데이터를 모으는 IoT에서 스스로 판단하는 AIoT로의 이동이다. 공장 설비, 물류 장비, 보안 카메라, 로봇 플랫폼이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읽고 판단할 수 있어야 Physical AI가 산업 현장에서 작동할 수 있다. 특히 클라우드 연결이 불안정하거나 즉각적인 반응이 필요한 환경에서는 엣지 단에서 AI 추론을 수행하는 기술이 필수적이다.
PC 하드웨어 기업 Zalman도 AI PC 확산에 따라 중요성이 커지는 냉각 기술과 열 관리 솔루션을 선보이며 새로운 시장 기회를 모색했다. AI PC와 고성능 워크스테이션은 기존 일반 PC보다 높은 연산 부하와 발열을 동반한다. Zalman의 냉각·케이스 기술은 고성능 GPU와 AI 가속기가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기반 부품으로, AI 하드웨어 생태계의 보이지 않는 필수 요소에 가깝다.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BJFEZ)과 대구경북경제자유구역청(DGFEZ) 등 지역 경제기관들도 참가해 한국 AI·반도체 클러스터의 경쟁력을 소개하고 해외 투자 유치 활동을 펼쳤다. 이들 기관은 개별 기업의 기술 전시를 넘어 한국의 산업 입지와 제조 기반, 연구개발 생태계를 함께 홍보했다. 글로벌 AI 공급망이 재편되는 시점에서 지역 클러스터의 경쟁력은 기업 유치와 공동 연구, 생산 거점 확보의 중요한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Edge AI’와 ‘Physical AI’가 만든 새로운 기회
이번 COMPUTEX에서 확인한 한국 기업들의 공통된 전략은 명확했다. 바로 저전력 Edge AI와 Physical AI였다. 업계는 앞으로 AI 산업이 데이터센터 중심의 클라우드 AI와 현장에서 즉시 판단하고 작동하는 Edge AI가 결합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과정에서 NVIDIA의 Jetson Thor와 같은 고성능 플랫폼과 DEEPX 같은 초저전력 NPU를 결합하는 하이브리드 구조가 새로운 산업 표준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고성능 플랫폼은 복잡한 로봇 제어와 멀티모달 인식에 강점을 갖고, 초저전력 NPU는 카메라·센서·소형 장비 안에서 지속적으로 AI 추론을 수행하는 데 유리하다. 결국 Physical AI는 하나의 칩이나 플랫폼이 아니라, 클라우드와 엣지, 메모리와 디스플레이, 센서와 로봇이 결합된 시스템 경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대기업들은 메모리와 디스플레이, 시스템 인프라를 공급하며 AI 생태계의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반면 스타트업들은 전력 효율과 비용 경쟁력을 무기로 실제 산업 현장에서 활용 가능한 솔루션을 제공하며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업계 관계자들은 한국 기업들이 단순한 부품 공급자를 넘어 AI 시스템 설계와 응용 분야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AI 공급망에서 AI 솔루션 국가로
COMPUTEX 2026은 한국 AI 산업의 현재 위치를 보여주는 동시에 앞으로의 방향성을 제시한 무대였다. 그동안 한국은 메모리와 디스플레이, 반도체 제조 역량을 기반으로 글로벌 AI 공급망의 핵심 축을 담당해 왔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는 단순한 부품 공급을 넘어 실제 산업 현장에서 활용되는 Physical AI 솔루션 제공자로 진화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초저전력 AI 반도체를 개발하는 스타트업들의 혁신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LG전자 등 대기업들의 인프라 경쟁력이 결합될 경우 한국은 향후 글로벌 로보틱스와 Edge AI 시장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AI가 데이터센터를 넘어 공장, 물류센터, 병원, 자동차, 가정으로 확산될수록 전력 효율과 안정성, 현장 적용성은 핵심 경쟁력이 된다.
COMPUTEX 2026 현장에서 만난 한국 기업들의 부스는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AI가 데이터센터를 넘어 현실 세계로 확장되는 미래를 보여주는 작은 실험실이자, 한국 AI 산업이 다음 단계로 도약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한국의 과제는 이제 좋은 부품을 공급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실제 산업 현장에서 작동하는 AI 솔루션을 얼마나 빠르고 안정적으로 구현하느냐가 다음 경쟁의 기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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