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시그널] 세계유산위원회는 왜 ‘세계 문화부’가 되어가고 있는가
[투데이 시그널] 세계유산위원회는 왜 ‘세계 문화부’가 되어가고 있는가
  • Korea IT Times 편집국
  • Published 2026.07.22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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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등재를 넘어 국가의 개발·기후·관광·데이터 정책까지 들여다보는 글로벌 거버넌스의 부상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각국 대표들이 신규 세계유산 등재와 기존 세계유산의 보존 현황을 심의하고 있다. / Korea IT Times

 

현장 취재 3 | 부산=공동 취재팀

세계유산위원회에는 군대도, 경찰도, 세금을 거둘 권한도 없다. 그럼에도 이 기구의 결정은 초고층 건물 계획을 수정하게 하고, 광산 개발을 중단시키며, 도로와 항만의 위치까지 다시 검토하게 만든다. 문화재를 등재하고 보호하는 국제회의로 출발한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위원회가 이제는 각국의 개발과 환경, 관광, 도시계획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실상의 ‘세계 문화부’로 진화하고 있다.

제48차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리고 있는 부산 벡스코는 이러한 변화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번 회의에서 심사하는 신규 세계유산 후보는 30건인 반면, 기존 세계유산의 보존 상태를 점검하는 안건은 147건에 달한다. 새로운 유산을 목록에 올리는 일보다 이미 등재된 유산을 지켜내는 일이 훨씬 더 큰 업무가 된 것이다. 세계유산 체제의 중심이 ‘선정’에서 ‘관리와 감독’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다.

등재는 명예가 아니라 국제적 검증의 시작이다

각국 정부는 세계유산 등재를 국가적 성취로 홍보한다. 하지만 등재는 훈장을 받는 순간이 아니라 국제사회와 보존 책임을 나누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세계유산을 보유한 국가는 해당 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OUV)’를 지속적으로 보존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개발계획과 관광정책, 건축 규제, 환경관리까지 국제적 보존 기준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세계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댐, 풍력발전소, 고층건물, 주거단지, 항만시설 등의 개발사업이 추진될 경우, 세계유산위원회는 유산영향평가(HIA) 실시와 관리계획의 보완을 요구하거나 권고할 수 있다. 위협이 심각하다고 판단되면 해당 유산을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으로 지정할 수 있으며, 보존 가치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면 세계유산 목록에서 삭제하는 결정도 가능하다.

유네스코가 국내 인허가권을 직접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계유산 지위의 훼손이나 상실은 국가 이미지와 관광, 외교관계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법적 강제력은 제한적이지만 정치적·경제적 파급력은 결코 작지 않다. 세계유산 등재는 국제적 명예를 얻는 대신 지속적인 검증과 책임을 받아들이는 약속이다.

과학적 판단 위에 외교가 올라선다

세계유산협약에는 196개국이 참여하고 있지만, 실제 의결권은 21개 위원국이 행사한다. 문화유산은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자연유산은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보존과 역량 강화는 국제문화재보존복구연구센터(ICCROM)가 전문적으로 검토한다.

그러나 최종 결정은 정부 대표들로 구성된 세계유산위원회가 내린다. 전문가들은 과학적·기술적 기준에 따라 등재 보류나 추가 검토를 권고할 수 있지만, 위원국들은 외교적 이해관계와 지역 안배, 국가 간 협상을 반영해 권고안을 수정하거나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세계유산위원회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정치적 압력도 함께 높아지는 이유다. 세계유산 제도는 과학과 외교가 교차하는 공간이며, 두 영역이 충돌할 때 어떤 판단이 우선하느냐가 제도의 신뢰를 좌우한다. 전문성보다 외교적 타협이 앞서면 세계유산 제도의 권위는 약화된다. 반대로 전문가 판단만을 절대화하면 각국의 주권과 지역사회의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 세계유산위원회가 풀어야 할 핵심은 권한의 확대가 아니다. 과학적 근거와 정치적 현실 사이에서 판단의 일관성과 신뢰를 유지하는 일이다.

세계유산을 위협하는 것은 파괴보다 성장이다

오늘날 세계유산을 위협하는 것은 전쟁과 자연재해만이 아니다. 도시개발과 에너지 사업, 교통망 확충, 관광산업과 부동산 가격 상승도 유산의 존립을 흔든다. 역사도시에서는 주민의 주거권과 건축물 보존이 충돌한다. 자연유산에서는 에너지 개발과 생태계 보호가 맞서며, 관광객 증가는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지만 과잉관광은 유산과 주민의 일상을 동시에 훼손한다.

보존정책이 언제나 긍정적인 결과만을 낳는 것도 아니다. 대체 산업이나 주민 보상 없이 개발만 제한하면 보존은 지역사회에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정책으로 변할 수 있다. 주민이 떠난 역사도시는 외형만 남은 관광지가 되고, 생업을 잃은 공동체는 보존정책의 반대편에 서게 된다. 세계유산위원회가 다뤄야 할 대상은 건축물과 자연경관뿐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다.

기후위기는 문화재 행정을 국가정책으로 확장시킨다

기후변화는 세계유산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해수면 상승은 해안 유산을 침식시키고, 수온 상승은 산호 생태계를 무너뜨린다. 산불과 홍수, 가뭄, 빙하 소멸은 기존 복원기술만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속도로 유산의 보존 조건을 바꾸고 있다. 문화재를 원형대로 복원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이제 세계유산 보존은 문화재 담당 부처만의 업무가 아니다. 탄소배출과 에너지정책, 수자원 관리, 도시계획, 재난대응, 산업개발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유네스코가 각국의 환경과 국토, 산업정책까지 들여다보게 된 배경도 여기에 있다. 유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 운영의 핵심 영역과 연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계 문화부’라는 표현은 더 이상 단순한 비유에 머물지 않는다. 세계유산위원회는 문화재 보호를 넘어 각국의 정책 선택을 조정하고 평가하는 국제 거버넌스로 이동하고 있다.

AI는 보존의 도구이자 새로운 권력이다

인공지능과 위성영상, 드론, 센서, 디지털 트윈은 세계유산 관리 방식을 빠르게 바꾸고 있다. 이 기술들은 건축물의 미세한 균열과, 지반 변화, 불법 개발, 산림 훼손을 조기에 포착할 수 있다. 전쟁과 재난으로 소멸할 위험이 있는 유산을 정밀하게 기록하고, 복원과 재난대응 시나리오를 설계하는 데도 활용된다. 기술은 세계유산 관리의 속도와 정확성을 높이는 새로운 기반이 되고 있다.

그러나 기술의 도입은 새로운 쟁점을 낳는다. 유산 데이터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특정 국가나 글로벌 기업이 구축한 AI의 평가 알고리즘이 얼마나 투명한지에 대한 국제적 기준은 아직 충분하지 않다. 원주민의 성지나 종교적 공간을 디지털로 복제할 권한을 누가 갖는지도 민감한 문제다. AI가 생성한 가상 복원 이미지를 역사적 증거와 어떻게 구분할 것인지도 해결해야 한다.

디지털 기술은 유산을 보호할 수 있지만, 기술을 보유한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 사이의 격차를 확대할 수도 있다. 따라서 세계유산의 디지털 전환은 장비와 기술의 보급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데이터 소유권과 접근권, 지역사회의 동의, 알고리즘의 투명성, 장기 보존 원칙을 담은 국제 기준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 디지털 유산관리의 핵심 자산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신뢰다.

세계유산 목록은 늘었지만 관리 능력은 따라오지 못했다

세계유산 등재에는 막대한 인력과 예산이 투입된다. 그러나 등재 이후 수십 년간 지속돼야 할 관리체계는 종종 정책의 후순위로 밀린다. 역사도시는 건축 높이와 교통, 상업시설, 관광객 흐름을 장기간 관리해야 한다. 자연유산은 야생동물과 산림, 수질, 해양생태계를 지속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전쟁 피해를 입은 유산은 긴급 복구를 넘어 주민 귀환과 도시 재건, 복원의 진정성까지 함께 다뤄야 한다. 등재는 한 번의 성과지만 보존은 세대에 걸친 책임이다. 특히 개발도상국과 소도서국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유산을 보유하고도 전문인력과 장비, 재난대응 예산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세계유산 목록이 확대되는 속도를 현장의 관리 역량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목록이 늘어날수록 국제사회의 문화적 자산은 커지지만,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는 유산도 함께 늘어날 수 있다. 이른바 ‘보존의 부채’가 축적되는 구조다. 세계유산 체제의 지속 가능성은 새로운 등재 건수가 아니라 기존 유산을 관리할 재원과 전문인력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

주민을 배제한 보존은 유산의 생명력을 잃게 한다

부산 회의에서는 본회의와 함께 현장 관리자 포럼, 청년 전문가 프로그램, 원주민과 지역사회 참여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는 세계유산 제도가 오랫동안 안고 있던 구조적 한계를 보완하려는 시도다. 주요 결정은 중앙정부와 국제 전문가가 내렸지만, 그 결과는 현장 주민이 감당해 온 경우가 많았다. 관광객이 몰리면 주민은 소음과 교통 혼잡, 임대료 상승을 견뎌야 한다.

보존구역이 확대되면 농민과 어민의 생업이 제한될 수 있다. 국제 기준에 따른 복원사업이 오히려 지역 공동체의 기억과 전통을 밀어내는 사례도 나타난다. 주민은 보존의 장애물이 아니라 유산을 구성하는 핵심 주체다. 그들을 의사결정에서 배제한 채 건축물과 자연만 보호한다면 세계유산은 살아 있는 공간이 아니라 국제사회가 관리하는 전시품으로 변한다. 부산선언이 강조한 ‘협력’도 정부 간 협력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전문가와 주민, 기술기업과 지역 공동체 사이에 권한과 책임이 실질적으로 분배돼야 한다.

가장 강력한 무기는 법이 아니라 평판이다

세계유산위원회의 가장 강력한 수단은 법적 제재가 아니라 국제적 평판이다. 위험유산 지정이나 등재 취소 가능성은 해당 국가가 세계유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국제적 신호가 된다. 이는 관광, 외교, 국가 브랜드에 직접적인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법적 집행력이 약한 세계유산위원회가 회원국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핵심 수단이 바로 이 평판의 압력이다.

그러나 평판의 힘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국가가 국제적 명예를 중시할 때 유네스코의 권고는 강하게 작동하지만, 전쟁과 안보, 대규모 경제개발이 최우선 과제가 되면 영향력은 급격히 약해진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세계 문화부에 가까운 책임을 지고 있지만, 회원국의 협조 없이는 결정 내용을 직접 집행할 수 없다. 강한 영향력과 제한된 집행력의 공존은 세계유산 체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이다.

부산이 드러낸 세계유산 권력의 이동

부산 회의의 주요 뉴스는 신규 세계유산 목록으로 채워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번 회의가 보여준 본질적 변화는 등재 결과보다 세계유산위원회의 역할 확대에 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문화재의 가치를 판정하는 기구에서 국가의 개발정책과 도시계획, 기후대응, 관광정책, AI와 데이터 활용까지 들여다보는 글로벌 거버넌스로 이동하고 있다.

권한과 기대는 커졌지만 재정과 집행수단은 충분하지 않다. 보호해야 할 유산은 늘어나지만 현장 인력과 관리 역량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부산선언이 제시한 협력은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한 출발점이다. 향후 세계유산 체제의 신뢰는 선언문의 표현이 아니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현장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평가받게 될 것이다.

개발계획의 수정을 요구할 수 있는지, 전문가 판단이 외교적 타협으로 희석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지, 기술을 보유한 국가와 기업의 데이터 독점을 견제할 수 있는지가 주요 판단 기준이 될 것이다. 보존이라는 이름으로 주민에게 비용과 희생을 전가하지 않는 것 역시 세계유산 체제의 정당성을 가르는 핵심 조건이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이미 ‘세계 문화부’에 가까운 위치에 올라섰다. 이제 필요한 것은 더 넓은 권한이 아니라 확장된 책임을 감당할 재정과 전문성, 정치적 독립성, 국제사회가 신뢰할 수 있는 판단 기준이다. 세계유산의 미래는 정치와 경제의 압력 속에서도 국제사회가 스스로 세운 보존 원칙을 얼마나 일관되게 지켜내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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