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국가 연구개발(R&D) 예산 심의 과정에 처음으로 인공지능(AI)을 본격 도입한다. 매년 수천 건의 사업 계획서를 사람이 직접 검토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AI가 유사 사업 분석과 검토 의견 초안 작성까지 지원하는 형태다. 정부는 이를 계기로 ‘종이 없는 예산 심의’ 체계 전환에 속도를 낸다는 계획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14일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국내 AI 기업 업스테이지의 오픈소스 기반 모델 ‘솔라(Solar)’를 활용해 개발한 ‘예산 심의 특화 AI 서비스’를 공개했다.
이번 시스템은 과기정통부와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공동 개발했다. 외부망과 분리된 폐쇄형 구조로 구축됐으며, 국가정보원의 보안성 검증도 마쳤다. 정부는 국가 핵심 예산 데이터가 다뤄지는 만큼 보안성과 신뢰성을 우선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정부 R&D 예산 심의는 그동안 대표적인 ‘초고강도 행정 업무’로 꼽혀왔다. 매년 5~6월이면 전문위원들과 담당 공무원들은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사업 기획서와 예산 요구서를 검토해야 했다.
특히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은 사업 간 유사·중복성 분석이었다. 국가 예산이 투입되는 만큼 비슷한 사업이 중복 편성되지 않았는지 일일이 확인해야 했지만, 사업 수가 1000개를 넘다 보니 사실상 사람의 기억과 경험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새로 도입된 AI는 이 과정을 자동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시스템은 지난 5년간 축적된 약 5000건의 국가 R&D 사업 예산요구서와 기획보고서, 전문위원 검토 의견 등을 학습했다. 여기에 국가과학기술지식정보서비스(NTIS)에 축적된 1243만 건의 연구 성과 데이터까지 연동해 분석 정확도를 높였다.
기존 검색 시스템이 단순 키워드 중심이었다면, 이번 AI는 문맥과 연구 목적까지 분석해 유사 사업을 찾아낸다는 점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신규 사업이 제출되면 AI가 과거 유사 과제를 자동으로 제시하고, 중복 가능성이 높은 항목을 우선 검토 대상으로 분류하는 방식이다.
이날 현장 시연에서는 AI가 신규 사업과 유사성이 높은 과거 사업들을 자동으로 추출하고, 이를 토대로 검토 포인트를 정리하는 모습이 공개됐다. 회의록 요약과 검토 의견서 초안 작성 기능도 함께 시연됐다.
실제 예산 심의에 참여했던 전문위원들은 업무 부담 감소 효과를 체감했다고 평가했다. 다만 AI 특유의 ‘환각 현상(할루시네이션)’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제기됐다. 실제로 일부 문맥 해석 과정에서 논리 연결이 부자연스럽거나, 중요도를 과대 해석하는 사례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단순 정보 검색을 넘어 정책 타당성과 논리성을 평가하는 기능까지 고도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이번 사례를 단순 시범사업이 아니라 ‘독자 AI 행정 체계’ 구축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 특히 해외 빅테크 AI 모델이 아닌 국내 기업 모델을 기반으로 구축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번에 활용된 업스테이지의 ‘솔라’는 정부가 추진 중인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독파모)’ 사업의 핵심 후보 가운데 하나다. 정부는 공공 행정 분야에서 해외 AI 의존도를 낮추고, 한국형 데이터와 정책 환경에 최적화된 AI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우고 있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기정통부 장관은 “정부 부처 가운데 선도적으로 독자 AI 모델을 실제 업무에 적용한 사례”라며 “향후에는 각 부처가 사업을 기획하고 예산을 요구하는 단계까지 AI 지원 범위를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내년까지 예산 심의 전 과정의 AI 고도화를 마무리하고, 장기적으로는 부처 간 협업 과제 발굴과 국가 R&D 투자 포트폴리오 분석 등 정책 결정 전반에 AI 활용 범위를 넓혀간다는 계획이다.
행정 현장에서는 벌써부터 기대와 긴장이 교차하고 있다. 반복 업무를 줄여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기대가 커지는 한편, AI 판단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정책 책임성과 전문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나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