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과학은 왜 ‘오래 기여하는 인간’에 주목하나
노화과학은 왜 ‘오래 기여하는 인간’에 주목하나
  • 정연수
  • 승인 2026.06.05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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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의 새로운 장수 지표는 수명도, 건강수명도 아니다. 인간이 얼마나 오래 판단하고, 창조하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가가 장수 담론의 다음 기준으로 부상하고 있다.

장수 담론은 세 단계로 이동하고 있다. Longevity 1.0이 오래 사는 것(Lifespan)에 집중했다면, Longevity 1.5는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Healthspan)을 강조했다. 이제 Longevity 2.0은 오래 기여하는 것(Contribution Span), 즉 인간이 얼마나 오래 배우고 판단하고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 관점에서 보면 핵심은 오래 사는 것도, 덜 아프게 사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얼마나 오래 배우고, 판단하고, 창조하고, 타인과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가다. Longevity 2.0은 생존의 연장이 아니라 인간 기능의 연장이다.

최근 장수 연구에서는 ‘피크스팬(Peakspan)’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이는 건강수명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개인이 자신의 최고 신체·인지 기능에 가까운 상태를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는지를 보는 개념이다. 질병이 없다고 해서 인간이 최고의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는 뜻은 아니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AI 때문이다. AI는 이미 보고서 작성, 번역, 코딩, 자료 분석, 검색과 요약 등 인간의 지식 노동 일부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인간의 경쟁력이 단순 정보 처리 능력에 머물러 있다면 그 가치는 점점 낮아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AI가 쉽게 대체하지 못하는 영역은 판단력, 책임감, 경험 기반의 통찰, 관계 형성 능력, 창의적 해석이다. 그러나 이 능력들도 신체 에너지, 뇌 건강, 수면, 운동 능력, 정서적 안정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AI 시대의 장수는 몸과 뇌가 얼마나 오래 고급 판단을 지속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이어진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고령화 경제 분석에서 건강한 노화가 노동 공급과 생산성을 높이고, 인구 감소가 경제 성장에 미치는 부담을 완화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는 고령층을 단순한 복지 비용의 대상으로 보던 기존 시각과 다르다. 건강한 고령층은 앞으로 국가 경쟁력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경제의 관점에서도 장수의 의미는 바뀌고 있다. 과거의 장수는 의료비와 연금 부담의 증가로 해석됐다. 그러나 Longevity 2.0에서는 건강한 고령 인구가 노동시장, 지식 산업, 교육, 창업, 지역사회 운영에 다시 참여할 수 있는 자산으로 재평가된다.

이 흐름에서 주목되는 인물 중 한 명이 Peter Attia다. 그는 캐나다 토론토 출신의 캐나다계 미국인 의사이자 장수의학 저자다. 스탠퍼드대 의과대학과 존스홉킨스병원에서 수련했으며, 현재 미국 텍사스 오스틴을 기반으로 예방 중심 장수의학을 대중화하고 있다.

Attia가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오래 사는 법이 아니다. 그는 저서 『Outlive』와 자신의 의학적 접근에서 마지막 10년을 병과 쇠약으로 보내지 않기 위해 중년부터 신체 기능, 대사 건강, 근력, 심폐 능력, 정서 건강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센테니언 데카슬론(Centenarian Decathlon)’ 개념은 100세에도 계단을 오르고, 여행 가방을 들고, 손주를 안을 수 있는 능력을 목표로 삼는다.

이 관점은 장수 담론을 매우 현실적인 질문으로 바꾼다. 인간은 100세까지 살 수 있는가가 아니라, 100세에도 자기 삶을 스스로 운영할 수 있는가. 오래 살 수 있는가가 아니라, 오래 쓸 수 있는 몸과 뇌를 유지할 수 있는가.

AI 시대의 역설은 여기에 있다. 기계가 더 똑똑해질수록 인간에게 남는 가치는 더 인간적인 능력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그 능력은 추상적인 정신력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근육, 심폐 기능, 수면, 혈당, 뇌 건강, 사회적 관계가 모두 인간의 판단력과 생산성을 떠받치는 인프라가 된다.

따라서 Longevity 2.0은 항노화 산업의 다음 유행어가 아니다. 그것은 고령화 사회가 인간을 비용으로 볼 것인지, 자산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경제적 질문이다. 동시에 AI 시대에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가치를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문명적 질문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이 화두는 더 이상 먼 이야기가 아니다. 초고령사회 진입, 생산가능인구 감소, 의료비 증가, 연금 부담, AI 자동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장수를 단순한 복지 문제로만 다룬다면 비용은 커지고 가능성은 작아진다.

반대로 건강한 고령층의 경험과 판단력, 사회적 기여를 다시 설계한다면 장수는 국가 부담이 아니라 새로운 성장 자산이 될 수 있다. 앞으로의 경쟁력은 젊은 인구의 숫자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래 기능하고, 오래 배우고, 오래 기여할 수 있는가가 국가의 지속 가능성을 가를 수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장수를 죽음의 지연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Longevity 2.0의 핵심은 죽음을 늦추는 것이 아니라 기능의 하락을 늦추는 데 있다. 장수의 목표는 생존이 아니라 기여다.

어쩌면 AI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인간의 수명을 늘리는 데 있지 않을지 모른다. 인간이 얼마나 오래 인간답게 판단하고, 창조하고, 관계를 맺고,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가 새로운 기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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